[동아플래시100]죄없는 농민들 성기 고문해 살인‧방화범 만든 일제경찰

이진 기자 입력 2021-03-23 10:40수정 2021-03-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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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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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평안북도 희천군에 독립군 17명이 침투했습니다.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로 국경에서 멀지 않아 독립군이 자주 습격하던 곳이었죠. 치열한 교전 끝에 순사와 주민 1명이 숨지고 파출소 면사무소 민가 20여 채가 불에 탔습니다. 일제 경찰은 곧 수색대를 구성해 추격에 나섰고 관련 용의자들을 검거했습니다. 줄잡아 36명을 붙잡아 조사했고 재판에 넘겨진 26명은 1심에서 징역형 5~7년을 받았습니다. 살인과 방화 혐의였죠.

평양복심법원 2심에서 끔찍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피고들이 조사 도중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던 겁니다. 온몸을 묶어 높이 매달아 놓는 바람에 정신을 잃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죠.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맨살을 지지고 손톱눈에 대나무침을 박아 넣었다고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성기에 불침까지 놓았다고 했죠. 무려 11일 동안이나 이런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손이나 팔은 물론 다리까지 못 쓰게 된 사람이 여럿이었죠.



고문은 남녀를 맞바꾸는 것을 빼고는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희천군 피고들도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문에 없는 사실을 있다고 했고 영문도 모른 채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했죠. 2심에서는 독립군에게 길안내를 해주거나 경찰의 움직임을 알려주었다는 혐의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번복했습니다. 이에 변호인들은 재판장에게 고문 정도를 한 번 자세히 검증해 달라고 요청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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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은 즉시 피고들한테 옷을 벗으라고 했죠. 알몸에 새겨진 참혹한 고문 흔적에 법관들은 얼굴을 찡그렸고 방청인들의 낯빛도 변했습니다. 피고들은 가슴속 억눌렸던 한이 터졌는지 대성통곡을 했죠. 신체감정을 맡은 일본인 의사는 피고 23명에게 불에 데거나 맞거나 묶여 생긴 상처가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경찰 조사 후 8개월이 지났는데도 이 지경이었으니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 걸까요. 하지만 검사는 다시 감정을 하자며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증인 심문 때는 더 기막힌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습격 당일 흰옷 입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더라며 경찰이 독립군 지도자의 출신 마을을 쳐들어갔죠. 부녀자들만 잡아다 주리를 틀거나 매질을 하며 ‘네 남편이 그날 밤 나가서 자지 않았느냐’고 억지 대답을 강요했습니다. 심지어 한 부인한테는 성기에 심지를 꽂고 불을 붙여 큰 화상을 입히기까지 했죠. 정말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습니다.

증인으로 나온 경찰 6명은 모두 ‘고문한 일이 없다’고 잡아뗐죠. 듣고 있던 피고들은 “우리를 때려 병신을 만들어 놓고 우리 집에 불을 놓으며 총으로 닭을 쏘아 잡아먹는 등 갖은 폭행을 다하고도 안 했다는 말이 웬 말이오”라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피고들은 순박한 농민이었죠. 가장이 잡혀가고 집을 잃은 가족들은 나무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했고 여비가 없어 법정엔 못 갔습니다. 피고 한 명은 고문 후유증인지 폐렴에 걸려 재판 도중 외롭게 숨졌죠.



비슷한 시기에 대구에서는 ‘경북중대사건’이 동포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권총으로 부자를 협박해 군자금을 받으려 했다는 혐의로 경찰이 9명을 붙잡아 조사한 사건이었죠. 조사 도중에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은 물을 코와 입에 들이붓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쇠가락을 넣어 비트는 고문을 했습니다. 담뱃불로 얼굴과 가슴 여기저기를 지지고 심지어 성기 끝까지 지졌다고 했죠.

‘희천사건’ 진상이 알려지자 조선변호사협회는 조사위원을 뽑고 김병로 변호사를 파견해 변론을 지원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우리도 사람이다. 피부를 아낄 줄 알고 생명이 귀한 줄 안다’며 이런 고문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성토하며 계속 기사를 실었죠. 부녀자 악행 소식에는 ‘비인간의 만행을 마음대로 행하며 거룩한 사람의 생명을 죄 없이 죽이는데 무슨 말로 변명을 요구하며 사과를 바라겠는가’라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2심에서는 피고 3명의 징역형이 7년에서 5년으로 줄었을 뿐 나머지는 1심과 같이 징역형 5년을 받았죠. 무죄까지 기대했던 희망이 꺾이자 법정은 다시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피고들은 곧바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모두 기각됐죠. 일제강점기 경찰 검찰 법원의 실상을 보여준 한 단면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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