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때문에 성추문에 ‘침묵’…“위선” 비판에도 입 다문 바이든[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미경 기자 입력 2021-03-16 14:00수정 2021-03-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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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백악관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였다면 이런 기념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갔겠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여성의 날을 챙기고, 기념 연설도 한 것이지요. 문제는 연설이 끝난 후. 기자들까지 모아놓고 연설한 뒤 질문도 받지 않고 나가버렸습니다. 기자들 사이에 “쿠오모”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추문 논란으로 시끄러운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나올 것을 우려해 이런 행사에 으레 따라붙는 질의 응답 세션을 생략하고 자리를 뜬 것이지요.

성추문으로 사임 압력을 받고 있는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큰 머플러를 두르고 통화하는 모습. 걸친 머플러가 어울리지 않아 쿠오모 주지사가 최근 사망자 통계 축소 의혹을 받고 있는 “요양원에서 훔친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고 있다. 데일리메일

쿠오모 주지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계속 늘어나 7번째 여성까지 등장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주 의회는 탄핵 조사를 승인했지만 쿠오모 주지사는 “비난받을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며 “물러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쿠오모 주지사 때문에 함께 비난을 받는 사람이 바이든 대통령입니다. 여성 유권자들의 큰 지지를 얻고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쿠오모 성추문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은 유세 전략으로 잘 활용해놓고 쿠오모 성추문에는 입을 다문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더블 스탠더드(이중 잣대)” “위선”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에서 쿠오모 관련 질문에 대응하느라 매일 진땀을 뺍니다. “대통령은 언제 보고받았느냐” “조사위원회의 독립성은 보장되느냐” “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아무런 언급이 없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롭지만 사키 대변인은 비슷한 답변을 반복할 뿐입니다. “백악관은 독립적인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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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종종 접합니다. 대통령이나 집권 세력을 난처하게 만드는 논란거리가 발생하면 조사위원회 활동을 앞세워 상황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사위원회가 그다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 경우도 논란의 장본인 쿠오모 주지사가 직접 지시를 내린 조사위원회여서 조사 결과에 대한 기대는 별로 높지 않은 듯 합니다.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왼쪽), 아들 앤드류 쿠오모 현 뉴욕 주지사(가운데), 마리오 전 주지사의 부인 마틸다 여사(오른쪽). 뉴욕 WRVO 라디오 홈페이지
2015년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의 장례식에 서둘러 입장하는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 부부. 뉴욕타임스

바이든 대통령이 쿠오모 주지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우정 때문입니다. 쿠오모는 민주당 주지사 집안입니다. 아버지는 1983~1992년 뉴욕 주지사를 지낸 마리오 쿠오모입니다. 아버지 마리오 주지사는 인기가 높아 대선 출마 권유도 많이 받았죠. 1988년, 1992년 대선 때 민주당 지도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 약속을 받지만 본인이 “대통령 야망이 없다”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1988년 대선 때는 일찌감치 불출마 선언을 해 당시 민주당 경선에 나섰던 바이든 후보의 고민을 덜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때 시작된 우정은 아들 세대로 이어져 2016년 대선 때 빛을 발했습니다. 2015년 바이든 부통령과 아들 쿠오모 주지사는 비슷한 인생의 고비를 겪습니다. 바이든 부통령은 사랑하는 맏아들 보를 뇌종양으로 잃습니다. 쿠오모 주지사는 재선에 성공해 선서하기 몇 시간 전 아버지 마리오가 세상을 떠납니다. 둘은 모두 시련에 빠졌지만 쿠오모 주지사가 먼저 털고 일어나 바이든 부통령에게 전화를 합니다. “내년(2016년) 대선에 출마해라. 그러면 가장 많은 대의원이 걸린 뉴욕은 내가 도와주겠다”는 권유였죠.

2018년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오른쪽)의 3선 도전 출정식에 찬조 연설자로 나서 포옹하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왼쪽). 데모크래트앤크로니클


당시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는 이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바이든 부통령이 출마 의사를 정확히 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힐러리 지원 유세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2016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힐러리에 대적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죠. 그래도 바이든은 쿠오모 주지사에게 두고두고 고마움을 나타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주저앉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쿠오모”라고요.

2020년 대선 때 바이든-쿠오모 관계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바이든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을 때 가장 먼저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기획한 것이 쿠오모 주지사입니다. 민주당 경선 초반에 바이든 후보가 피터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 시장 같은 신세대 후보들에 밀려 말실수를 연발하며 체면이 서지 않자 쿠오모 주지사는 특유의 입심을 발휘해 열심히 거듭니다. 뉴욕의 토크 라디오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대선 레이스에서 내 돈을 어디에 걸 거냐고? 물론 바이든이지. 그는 승리를 위한 비장의 무기를 가졌어. 바로 ‘신뢰’라는 거지” 등의 지원 발언을 합니다. 바이든 역시 쿠오모 주지사가 코로나19 리더십으로 좋은 평가를 얻자 “이게 바로 위기 관리의 ‘황금 기준(골든 스탠더드)’”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요즘 쿠오모 주지사의 인기가 급락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빨리 ‘황금 기준’ 칭찬을 취소하라”는 원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대통령이 성추문을 일으킨 정치인에게 “물러나라”고 대놓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정도의 간접적인 언급만 해도 알아서 물러나는 것이 미국의 정치문화입니다.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죠. 하지만 쿠오모 주지사는 물러날 뜻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취소 문화(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유명인을 인터넷상에서 보이콧하는 운동)’에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자신에 대한 사임 압력을 조만간 사그라질 인터넷 열풍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쿠오모 성추문을 감싸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재촉하는 것은 물론 그가 내건 여성 포용 원칙의 진실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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