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할까’ 대신 ‘접속할까’ 묻는 세상 온다[신무경의 Let IT Go]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4일 0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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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하 스페이셜 창업자 인터뷰]
하루에 네다섯 시간 VR서 근무
표현력, 창의력 내는데 탁월한
홀로그래픽 오피스 선도할 것

“준비되셨으면 가상현실(VR)에서 뵐까요?”

VR로 구현된 가상공간 ‘스페이셜’을 만든 이진하 스페이셜 창업자(34)가 약속 시간이었던 지난달 21일 2시 반쯤 이런 생소한 메시지를 보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인터뷰에 줄곧 활용해온 여느 화상회의 서비스들도 가상공간에 접속한다는 측면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이번 인터뷰는 VR 기기인 오큘러스 퀘스트2를 머리에 써야만 해서인지 ‘가상공간에, 접속한다’는 느낌이 더 크게 와닿았다.

경기과학고를 수석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 매사추세츠공대(MIT), 삼성전자 최연소 수석연구원까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이진하 창업자는 VR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인사다. 다만 미국에서 창업한지라 물리적, 심리적 거리 때문에 미팅 요청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선뜻 들지 않았다. (포털에 이 창업자를 검색하면 뜨는 가상공간 저 너머에서 온 듯한 인상을 주는 증명사진 또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상대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마침 한국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종의 거리감이 사라져 ‘인터뷰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페이셜 앱에 접속한 뒤 ‘셀카’를 찍자 내 얼굴을 본 딴 아바타가 등장했다. 이 창업자가 빌려준 VR 기기와 연동해 가상공간 인터뷰룸에 접속했다. 곧 이 창업자가 들어왔다. 비록 아바타였지만 나도, 상대방도 실제 얼굴로 구현되니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임 속 캐릭터 다루듯 행동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함께.

―스페이셜은 왜 만들게 됐나요.

사무실에서는 상호작용이 중요해요.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그린다든지 포스트잇을 공유한다든지 옆에서 존재감을 느끼며 일해야 팀원 간 신뢰도를 쌓을 수 있죠.

이를 위해 스페이셜을 만들었는데요. 스페이셜 상에서 기존에 우리가 쓰던 문서 파일들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료들에게 내 컴퓨터의 화면을 공유하며 업무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포스트잇 같은 것들을 가상공간에 붙여놓을 수도 있죠. 여느 기업들이 사무실 한쪽에 다트 같은 오락 공간을 두듯 스페이셜 안에서 함께 게임을 즐길 수도 있고요.

처음에는 데이터가 많은 3차원(3D) 데이터 기업, 금융 기업 등에서 협업을 할 때 사용하는 플랫폼으로 시작했어요. 코로나19 이후에는 일반인들도 쓸 수 있는 VR 플랫폼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현재는 무거운 VR 기기가 저변 확대의 걸림돌이지만 하드웨어가 글래스 형태로 점점 가벼워지고 있어 ‘홀로그래픽 오피스’가 일반화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창업자는 인터뷰 중간 중간 가상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줬다. 스페이셜 안에서 파워포인트(PPT)를 띄우고, 포스트잇을 붙여보고, 웹사이트를 열어 검색해보고,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실시간 영상 모습까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접속 시간이 27분 40초를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터뷰가 아니라 체험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전날 이 회사가 ‘텔리’라는 앱을 출시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텔리는 오큘러스와 같은 VR 기기 없이도 스마트폰에서 스페이셜 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서비스다. 아바타 기반 화상통화 서비스이기도 하고. 텔리에 접속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텔리를 만든 취지는 무엇인가요.

VR 기기 제약 없이 스마트폰으로 가상의 방에 들어가 실물과 같은 아바타를 만나고 파일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있었어요. 모바일 앱을 통해 사용자에게 스페이셜의 경험을 전달하고 싶기도 했고요. 텔리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증강현실(AR), VR 기기를 구입해 스페이셜과 같은 몰입감 있는 경험을 해보려는 시도들이 생겨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페이셜을 적용한 사례들은 많나요.


직원 규모가 100여 명 정도인 일본의 한 인공지능(AI) 개발 회사가 대표적인 예인데요. 오피스를 아예 없애고 스페이셜을 본사로 두고 가상공간에서 미팅을 하며 업무를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다양한 사례들도 나오고 있어요. 미 애리조나대의 한 입문학 수업에서 사용하기도 했고, 유명 배우가 연극을 한 경우도 있어요. 올해 스페이셜에서 일어난 미팅만 42만 건, 3만 시간 정도 됩니다. 통상 30~40분 정도 이용하곤 해요.

물론 신기해서 써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한 번 접속하고 그 다음은 안 쓰는 경우죠. 아무래도 VR 기기라는 허들 때문에 스페이셜을 함께 즐길 사람이 적어 재접속하지 않는 것이라 봤습니다. 이번에 텔리를 선보인 이유도 이 지점에 있어요. VR 기기가 있는 사람이 놀이방을 개설해서 링크를 보내면 친구들이 모바일로 접속해서 가상공간에서 미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한국 사례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고 묻자 “우리 기업들도 많지만 공개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는 스페이셜을 어떻게 활용하고 계신가요.

저희 회사 직원이 인턴 포함 20여 명 되거든요. 그런데 미국 뉴욕, 캔자스부터 뉴질랜드 등 각지에서 근무 중이에요. 그러다보니 스페이셜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죠.

저희 같은 경우는 프로젝트별로 룸을 만들어뒀어요. 엔지니어링방, 디자인 채널방, 텔리 채널방 등등. 텔리에서 미팅이 있으면 그 방에 들어가서 리뷰 받고 피드백주고, 디자인 회의를 위해서 또 다른 방에 들어가서 리뷰와 피드백을 하는 식이죠. 구글 캘린더에 링크를 누르면 방별로 이동할 수 있도록 연동해둬서 편하거든요. 하루에 네다섯 시간은 VR 기기를 끼고 일하는 거 같아요. 이사회도 스페이셜로 하는데요. 화상회의 솔루션들보다 몰입감이 있어서 두세 시간은 금방 지나가더라고요. 무엇보다 공간 자체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VR 기기를 썼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화상회의 서비스들이 더 편한 거 같아요.


VR 기기는 매년 얇아지고 있어요. 현재 상황에서도 이용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먼저 의미 있는 유저 경험을 만들어 혜택을 주기 시작하면 시장이 커졌을 때 리더십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서비스 영향력이 더 커지면 빅브라더가 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상 공간 안에 들어오니 플랫폼 기업이 일거수일수족을 감시한다는 느낌이 더 크게 들거든요.


프라이버시 정책은 대기업 못지않게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가상공간에서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겠다는 데에는 공감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일례로 오프라인 출근이나 화상회의 대신 스페이셜을 쓰는 여성분들은 아바타가 자신의 실물을 대체하기 때문에 화장을 안 해서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비단 얼굴 얘기만은 아니에요. 코로나19로 자주 쓰게 된 화상회의 서비스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사적인 모습부터 공간까지 의도치 않게 나오게 되잖아요. 이런 측면에서 가상공간이 오히려 나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하는 거죠.

―미국에서 창업하신 이유는 뭔가요.

4년 전 창업할 때 가상현실에 대한 관심은 미국이 확실히 많았어요. 같이 일할 수 있는 인재들도 많았고요.

더 궁극적으로 저희는 기술을 만드는 곳이라기보다 홀로그래픽 오피스라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만드는 회사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 파급력이 있으려면 문화적 다양성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게 맞다고 보기도 했고요.

―본인이 생각하는 가상현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표현력을 이끌어내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표현력을 끌어낼 수 있는 충분한 도구가 되진 못한 거 같아요. 나아가서는 지역과 공간, 거리에 관계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사회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느냐에 따라 교육 기회가 제한되는데요. 그런 제약을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어요. 개인이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방식은 비행기 출장이라고 합니다. 가상공간이 출장을 대체하면 환경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무경 기자 y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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