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 친일? 항일! 사회葬 찬성? 반대! 운명한지 2주 만에…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2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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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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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두 사람의 장례를 놓고 대한민국 사회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습니다.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과 친일 논란이 있는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장지를 둘러싸고 극심한 대립이 일어났죠. 약 1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구한말 대신으로 당대의 문장가이자 사회 원로였던 운양 김윤식의 사회장을 놓고 충돌이 빚어진 겁니다.

운양은 격변의 시기에 독판교섭통상사무, 군국기무처 회의원, 외무아문대신 등을 역임하며 외교가로서 열강의 틈새에서 때로는 청나라와, 때로는 일본과 손잡았습니다. 스스로 처신에도 오해를 살 만한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운양은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논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운양 김윤식. 격변기 열강들의 틈새에서 외교가로서 온갖 풍상을 겪었지만, 죽은 뒤에도 사회주의 세력이 그의 사회장을 반대하는 바람에 파란을 겪었다. 동아일보DB
한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운양 김윤식. 격변기 열강들의 틈새에서 외교가로서 온갖 풍상을 겪었지만, 죽은 뒤에도 사회주의 세력이 그의 사회장을 반대하는 바람에 파란을 겪었다. 동아일보DB



1910년 일제가 총칼로 대한제국 병합조약을 강제할 때 운양이 ‘불가불가(不可不可)’라고 했다는 건 그의 처세에 관해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일화입니다. ‘불가, 불가’로 띄어 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뜻이 되지만, ‘불가불 가’로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찬성한다’가 되기 때문이죠. 망국 후 순종의 권유로 내키지 않는 일제의 자작 작위를 받은 것은 운양을 ‘친일’의 굴레에 가뒀습니다. 하지만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총독부에 보내 옥고를 치르고 작위도 박탈당하는 등 분명한 항일 족적도 남겼습니다.

부침과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던 운양은 말년 자택에 칩거하면서 지병에도 약을 쓰지 않고 1922년 1월 21일 87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영사인간약 장음석두천(永辭人間藥 長飮石竇泉·인간 세상의 약은 사양하고 돌구멍 샘물을 마시련다)’에서는 이미 신선 세계에 들어간 듯한 선비의 풍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운양의 축사. ‘눈을 부릅떠 천하의 대세를 가늠하고, 고금의 시의를 헤아리고 헤아려라’는 뜻이다. 동아일보DB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운양의 축사. ‘눈을 부릅떠 천하의 대세를 가늠하고, 고금의 시의를 헤아리고 헤아려라’는 뜻이다.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운양이 유명을 달리하자 1월 23일자 사설 ‘운양 선생의 영면을 애도하노라’를 실어 그의 일생을 되짚었습니다. 논란이 있는 인물이라 ‘간혹 때에 따라서는 명철보신으로 자신의 몸을 보존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공적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결국 그가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임을 슬퍼하고자 하며’와 같은 표현이 눈에 띕니다. 하지만 사설은 민중을 진심으로 위하는 정치가의 면모와 함께 문장가로서의 풍미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면서 운양을 ‘시인 같은 정치가이며, 정치가 같은 시인’이라고 칭했습니다.

이어 1월 26일자 사설 ‘운양 선생 장송(葬送)에 대하여’에서는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의 말을 인용하며 그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실패와 흠결이 있다 할지라도 탁월한 문장과 민중을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을 생각해 원로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22년 2월 4일 거행된 운양의 장례식 광경. 위로부터 봉익동 자택을 떠나 종로를 따라 진행하는 상여, 동대문 밖 수레마당 터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운양의 영결식에 모여든 1000여 명의 조문객들. 동아일보DB
1922년 2월 4일 거행된 운양의 장례식 광경. 위로부터 봉익동 자택을 떠나 종로를 따라 진행하는 상여, 동대문 밖 수레마당 터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운양의 영결식에 모여든 1000여 명의 조문객들. 동아일보DB



운양은 최후를 맞을 때 “내 장의를 간소하게 거행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각계 인사들은 사회장을 결정했습니다. 사회장위원회를 구성하고 업무를 나눠 진행할 즈음 조선노동공제회, 무산자동지회 등 사회주의 세력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조선사회에 이렇다 할 공적을 남기지 못한 운양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파는 운양 사회장 논란을 기화로 자본주의계급 타파, 사회개량세력 매장 등 계급투쟁으로 수위를 높여갔습니다.

결국 사회장위원회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운양의 사회장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장위원장을 맡았던 박영효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장을 강행해 반대운동이 더 격렬해지면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분쟁이 커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운양의 장례식은 그가 운명한 지 2주 만인 2월 4일 1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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