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타자가 제일 강하다고?”…그 ‘강한’ 2번 타자 틀어줘[베이스볼 비키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3일 14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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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2위 팀 2번 타자 김하성. 동아일보DB
프로야구 2위 팀 2번 타자 김하성. 동아일보DB


이제는 2번 타자가 정말 강합니다. 4번 타자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2일까지 2020 프로야구는 전체 일정 가운데 50.3%를 소화했습니다. 이 기간 2번 타자는 OPS(출루율+장타력) 0.821을 기록했습니다. 4번 타자 기록이 0.824니까 이제 2번 타자는 4번 타자만큼 잘 치는 셈입니다.

단, 이제 4번 타자가 제일 잘 치는 타순도 아닙니다. 3번 타자 OPS가 0.891로 4번 타자보다 높았습니다.

이제 프로야구에서 '클린업 트리오'는 3~5번 타자가 아니라 2~4번 타자가 된 겁니다.


야구팬이라면 잘 아시는 것처럼 어떤 해에는 투고타저(投高打低)가 강하지만 바로 다음 해가 되면 타고투저(打高投低) 분위기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즌 기록을 비교할 때는 리그 평균을 100으로 놓고 환산하는 '플러스(+) 기록'을 활용하게 됩니다.

15년 전인 2005년 2번 타자 OPS+는 82가 전부였습니다. 리그 평균보다 18% 못 치는 타자가 2번 타순에 들어섰던 겁니다. 올해는 이 기록이 114까지 올랐습니다.

이렇게 OPS+ 변화가 큰 자리는 2번 타자뿐입니다. 그다음으로 OPS+ 변화가 컸던 3번 타순(113 → 132)과 비교해도 70% 가까이 더 변화가 컸습니다.


2번 타순이 강해지면서 제일 크게 변한 건 희생번트 점유율입니다.

2005년 리그 전체 희생번트는 704개였고 그 중 30.3%에 해당하는 213개가 2번 타자 몫이었습니다. 이번 시즌 현재 이 비율은 6.6%(226개 중 15개)로 줄었습니다.

반면 홈런 점유율은 6.1%에서 13%로 늘었습니다. 그러니까 2005년만 해도 2번 타자는 희생번트 성공이 주임무인 자리였지만 이제는 홈런을 쳐야 하는 자리로 바뀐 겁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2번 타자가 '감독의 아바타'였던 시절이 이제 저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번 타자 감독 아바타론(論)'를 제일 잘 보여준 선수는 현대 시절 박종호였습니다.

현대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재박 감독은 2003년 8월 15일 수원 안방 경기 때 팀이 삼성에 6-7로 끌려가던 9회말 무사 2루 상황에서 박종호에게 희생번트 사인을 냈습니다.

당시 프로야구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 상황에서 희생번트 사인이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날 박종호는 3루타(1회) → 홈런(3회) → 2루타(7회)를 모두 치면서 사이클링 히트에 단타 하나만을 남겨 놓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2003년 8월 15일 프로야구 수원 경기 현대 기록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제공
2003년 8월 15일 프로야구 수원 경기 현대 기록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제공

박종호는 한 시즌에 희생번트를 20개 이상 성공 시키던 '번트 아티스트'였지만 이 타석에서는 첫 번째 공과 두 번째 공 모두 번트를 시도한 공이 파울 라인 바깥에 떨어졌습니다.

박종호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방망이를 자기 뜻대로 휘두를 수 있으니까요.

현대 시절 박종호. 동아일보DB
현대 시절 박종호. 동아일보DB


야구에서는 2스크라이크 상황에서는 번트를 시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번트 파울'이 또 한 번 나오면 자동 삼진이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박종호는 유격수 앞 땅볼을 쳤고 2루 주자 브룸바가 3루로 뛰다가 태그 아웃 당하면서 현대는 득점권 찬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현대는 이 경기서 6-7로 패했습니다.

2003년 8월 15일 프로야구 수원 경기 삼성 기록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제공
2003년 8월 15일 프로야구 수원 경기 삼성 기록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제공


사실 프로야구 지도자들이 조금만 더 세이버메트릭스(야구통계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강한 2번 타자'는 진작에 등장했어야 할 개념입니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15년 동안 타순별 OPS가 팀 득점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아보면 2번 타자 자리가 제일 영향이 큽니다.

다른 타순이 잘 치는 것보다 2번 타자가 잘 칠 때 팀 득점이 더 많이 올라가고 못 치면 더 많이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가까운 2번 타자 홈런왕이 출현한다고 해도 놀라지 마세요.

'야구는 감독이 한다'는 명제가 '야구는 선수가 한다'는 명제로 바뀌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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