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내 피를 먼저” 양복에 폭탄 감추고 출발… 총독부서 “쾅”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1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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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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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일의 업무가 시작된 1921년 9월 12일 월요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수리공 차림의 한 사람이 조선총독부 정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이때 총독부는 광화문이 아니라 남산 기슭 왜성대에 있었죠. 그전 통감부가 쓰던 건물이었습니다. 이 수리공은 2층으로 올라가 비서과에 폭탄을 던진 뒤 곧이어 회계과장실 앞 응접실에도 폭탄을 던져 넣었죠.

비서과 인사계실에 날아든 폭탄은 직원 얼굴에 맞고 떨어졌지만 터지지는 않았습니다. 직원은 누가 장난으로 뭔가를 던진 줄 알았죠. 옆자리 직원이 “이거, 폭탄이다!”라고 소리쳐 소동이 나자마자 회계과장실 앞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폭탄의 굉음과 함께 마룻바닥에 15~18㎝의 구멍이 파이고 파편이 사방 벽과 아래층으로 튀면서 유리창들이 깨지고 아래층 책상과 의자가 파편으로 벌집이 되다시피 했죠.

왼쪽은 폭탄이 터져 큰 구멍이 파인 회계과장실 앞 마룻바닥. 오른쪽은 회계과장실 문 앞에서 피습현장을 살펴보는 총독부 직원. 출처=매일신보
왼쪽은 폭탄이 터져 큰 구멍이 파인 회계과장실 앞 마룻바닥. 오른쪽은 회계과장실 문 앞에서 피습현장을 살펴보는 총독부 직원. 출처=매일신보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직원들은 우왕좌왕하고 순사들이 뛰어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사이에 수리공은 “아부나이! 아부나이!”라고 외치며 뒷문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아부나이(危ない)’는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마침 출근한 총독부 2인자 미즈노 렌타로 정무총감이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검사도 현장에 출동해 조사를 했죠. 추가 언론 보도는 차단했고요. 경비가 삼엄했던 총독부가 무방비로 폭탄 공격을 당한 것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동아일보 9월 13일자 3면 기사 제목이 ‘총독부에 폭발탄!’이었죠.

수리공은 폭탄을 숨겨 들어올 때도 대담하고 태연했습니다. 중국 베이징을 출발할 때 일본사람처럼 보이게 양복을 입고 옷 안에 폭탄을 감췄죠. 경성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는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일본 여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부부처럼 보이게 행동해 일제 경찰의 검문을 피했습니다. 남대문역에 내렸을 때도 아이를 안고 일본 여자의 남편처럼 처신해 무사히 역을 나올 수 있었죠.

이 수리공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태원의 동생 집에서 하룻밤 숨어 있다가 13일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빠져나갔죠. 총독부가 피습당한 날 저녁 총독부 경찰부장이 본정경찰서장 종로경찰서장 동대문경찰서장 서대문경찰서장 등을 불러 모아 3시간이나 회의를 했지만 단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13, 14일에는 평안남도 경찰부에서도 피습 보고를 받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수리공은 이미 중국으로 넘어간 뒤였죠. 이 사람의 행적은 잠입부터 거사, 탈출까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습니다.

남산 기슭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 모습. 왼쪽은 정문, 오른쪽은 후문으로 보인다. 어느 곳이나 초소가 있고 경비가 삼엄하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남산 기슭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 모습. 왼쪽은 정문, 오른쪽은 후문으로 보인다. 어느 곳이나 초소가 있고 경비가 삼엄하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동아일보 9월 14일자 3면에 ‘시내 각 경찰서가 (범인 추적) 활동은 계속 하는 모양이나 자세한 사실은 아직 보도할 수 없더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결국 1921년이 다 지나가도록 범인은 오리무중이었죠. 일제 경찰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비밀회의를 거듭하고 눈에 불을 켠 채 범인을 찾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폭탄범이었던 셈이죠. 그래서였는지 일제 경찰은 보도를 차단하기만 했습니다.

수리공의 정체가 드러난 때는 이듬해 3월이었습니다. 이름은 김익상, 나이 28세, 의열단 단원이었죠.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붙잡히면서 그가 벌인 의열투쟁의 전모가 밝혀진 것입니다. 김익상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조선 독립은 2000만 민족 중 1600만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때 선두에서 희생해야 한다’고 하자 “우리보다 먼저 내가 피를 흘리자”라며 총독부 폭파 거사에 자원했습니다. 김익상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나카 저격사건을 다룰 때 소개하겠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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