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어둠 속 천둥번개 치고, 폭풍우 일어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3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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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4월 1일



플래시백

1921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1주년을 맞아 1면에 기념 사설을 실었습니다. 제목은 다소 평이한 ‘1년을 회고하야’인데, 부제(副題)가 오히려 눈길을 끕니다. ‘운뢰둔, 군자이경륜(雲雷屯, 君子以經綸)’. 주역에 나오는 말입니다. 주역은 인간과 자연의 존재 양상과 변화체계를 64괘(卦)로 설명하는데 이 중 세 번째인 ‘수뢰둔(水雷屯)’을 가져온 겁니다. 수뢰둔은 험난하고 꽉 막혀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상징하죠. 그러니 부제인 ‘운뢰둔…’은 ‘먹구름 속에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일어나니, 군자는 이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네요. 아직 알쏭달쏭하겠지만, 사설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해가 갑니다.

사설의 앞부분은 창간 당시의 감개무량함, 병들고 행방불명된 동인들에 대한 안타까움, 발매반포 금지와 무기정간 등 일제의 핍박, 그리고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동포의 사랑에 대한 감사 등입니다.

동아일보 창간 1주년인 1921년 4월 1일자 1면 상단 그림. 어린아이가 붓을 활에 장전하는 장면을 그려 필봉으로 일제를 겨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동아일보 창간 1주년인 1921년 4월 1일자 1면 상단 그림. 어린아이가 붓을 활에 장전하는 장면을 그려 필봉으로 일제를 겨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어 넓은 안목으로 천하의 대세를 고찰합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승전국이 파리강화회의를 열어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결정적 순간 등을 돌린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결정한 뒤였습니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나라들에 대해서는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한다는 원칙을 세웠죠. 국제평화와 안전, 국제협력 증진을 꾀한다는 취지에서 국제연맹을 설립한 데 이어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산하기관인 상설국제사법재판소도 태동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세계는 평화나 안전 같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 몫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는 욕심을 멈추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사설은 △패전국에 대한 시기와 의심 △‘세계의 화약고’ 발칸반도의 정정 불안 △위협받는 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 발트 해 연안 신생국 △영국과 프랑스의 알력 △미국의 고립주의 △소비에트정부 출범 등의 불안요인을 열거합니다. 그러면서 ‘빈국은 부국을 원망하고 부국은 빈국을 모멸하니 세계의 장래가 암담하고 인류의 앞길이 참담하다’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사설은 국내로 눈을 돌려 경제계, 정치계, 학술, 예술 등 모든 분야에 ‘큰 파도 같은 절대의 경쟁세력’이 조선인을 상류에서 하류로, 도회지에서 산간벽지로 쫓아내 쓸어버리는 경향이 날로 심하다고 진단을 내립니다. 이 세력이 일제를 가리킨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어 ‘이런 세계에, 이런 시대에, 이런 형편에 놓인 조선 사람은 장차 어떻게 그 운명을 개척하며, 그 행복을 꾀할 것인가’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민족을 기다리는 것은 폭풍우이며,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높은 산, 험한 고개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설은 주역의 ‘운뢰둔, 군자이경륜’을 인용해 어둠 속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이는 것은 곧 만물을 성장하게 하고, 생명을 통하게 하는 도리가 나타날 징조라면서 지금이 바로 마땅히 일할 때이며, 포부를 널리 펼 때라고 강조합니다. 이에 대비해 정성스럽게, 의연하게 정진하자면서 동아일보도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무거운 사명, 큰 임무를 기꺼이 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무렵 동아일보는 1면 맨 위에 사설을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창간 1주년 기념호인 이날만큼은 사설을 한 단 내리는 대신 무궁화동산의 어린아이가 붓을 들어 활에 장전하는 그림을 올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일제의 폭압으로 비록 지금은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암흑 속에 천둥번개와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지만, 첫돌을 맞은 동아일보가 날카로운 필봉으로 일제를 겨냥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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