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퇴직연금[횡설수설/서영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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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임금피크제 돌입을 앞두고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옮긴 A 씨. 최근 계좌를 열어보고는 얼어붙었다. 연금 총액은 3월 말 최저를 찍은 뒤 회복 중이었지만 ‘피 같은 나의 노후’가 코스피 등락에 따라 흔들린다는 사실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집 한 채에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을 노후 준비의 중심축으로 삼은 자신의 처지가 참담했고, 연금운용사에 대한 배신감도 컸다. 유명 금융기관에 퇴직금을 맡길 때는 ‘이 계좌가 내 노후에 도움을 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돌아온 것은 ‘투자 책임은 가입자에게 있다’는 차가운 현실이었다.

▷직장인들의 노후안전판인 퇴직연금에 빨간불이 켜졌다. 2005년 제도가 도입된 이래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218조 원 규모로 불어났지만, 42개 퇴직연금 사업자의 1년 수익률은 평균 0.43∼1.72%에 그치고 있다(3월 말 현재). 코로나 사태로 증시가 급락했고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으로 금융상품 수익률이 떨어진 탓. 적립금의 90% 이상이 저위험·저수익 상품에 쏠리는 등 가입자도 운용사도 기업도 퇴직연금 운용에 무관심한 현실이 한몫했다. 은행과 증권사 등 내로라하는 간판을 내건 운용사들은 고객 유치에만 힘쓰고 수익률은 방치하면서도 퇴직연금 수수료로 매년 0.45%, 근 1조 원을 걷어갔다. 1% 안팎의 쥐꼬리 수익에서 0.45%를 떼어가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평균 2.3%(금융투자협회)로 정기적금 이자율 정도에 그친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수준. 퇴직금을 굳이 퇴직연금에 묻어둘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많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그 어렵고 복잡한 투자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면서 손실이 나도 수수료는 꼬박꼬박 떼먹는다”고 분개하는 이유다. 퇴직금을 적립하느니 은행에 적금을 꼬박꼬박 붓는 게 나았던 것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은퇴 후 소득대체율 70%를 맞추려면 적어도 연 4% 정도의 수익률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연 5.2%의 수익률을 올리는 국민연금처럼 규모를 키워 기금형으로 만들거나 자동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주는 디폴트 옵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8.6%) 호주(9.2%) 등 연금 선진국들의 연간수익률이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것. 20대 국회에서 두 제도의 도입을 위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자동 폐기됐다. 국민 대부분의 은퇴 후 금융자산은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으로 구성된다. 방치된 퇴직연금은 방치된 노후 준비와 같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퇴직연금#임금피크제#노후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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