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총격 뒤 몰래 파묻힌 남편” 5·18유족의 원통한 사연

뉴시스 입력 2020-05-18 07:06수정 2020-05-18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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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 기념식서 광주교도소 민간인 학살 재조명
3공수 총격 뒤 암매장 발견 임은택씨 유가족 아픔 치유
“당신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라. 나랑 애들은 어떻게 살라고 그렇게 떠나부렀소. 인자는 편히 쉬시오. 아이고, 불쌍한 양반.”

18일 5·18민주화운동 40주년 정부 기념식에서 5·18 때 계엄군의 만행으로 남편을 잃은 최정희(73)씨가 원통한 사연을 소개한다.

5·18유족회가 펴낸 5·18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등에 따르면, 부산 출신인 최씨는 남편 임은택씨를 부산 국제시장에서 만나 결혼 생활하다 1978년 임씨 고향인 전남 담양 대덕면으로 이주했다.


소 사육 농가를 운영하던 임씨는 1980년 5월21일(당시 35세) 동료들에게 “광주에서 군인들이 빠져나가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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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소 판매 대금을 받으러 광주에 가야 했다. 광주서 볼일(경운기 부속과 벽지 구매 등)이 있던 같은 마을 이웃 3명과 함께 차량에 올랐다.

임씨 일행은 5월21일 오후 8시 각자 일을 마치고 담양으로 돌아오던 길, 광주교도소 뒤쪽 도로에서 3공수여단 군인들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당했다.

군의 피격으로 임씨와 고규석(고영태 전 더블루케이 이사의 아버지)씨가 숨졌고, 박만천·이승을씨는 상처를 입고 겨우 빠져나왔다.

임씨의 부인 최씨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애가 탔다. 최씨는 뜬눈으로 날을 새고 다음 날(5월22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두 양반(임씨와 고씨)이 총에 맞아 쓰러졌는데, 그때까지는 살아 있었어라. 그 뒤로 어찌 됐는가는…” 박만천·이승을씨는 미안함에 뒷말을 흐렸다.

최씨는 곧장 광주교도소 주변으로 향했다. 보리밭이든, 산속이든, 어디든 헤집고 다녔다. 흙을 판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곳이면 맨 손으로 땅을 파 헤쳤다.

계엄군에게 “니 놈들이 총으로 쐈응께, 우리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알 것 아니냐?”고 지적하다 울부짖었다. 군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총을 들이밀며 돌아가라고 협박했다.

최씨는 남편이 탔던 차량에 수많은 총탄 자국과 혈흔이 남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정신을 반쯤 놓았다. 주변 도랑에서 임씨의 신발 한 짝과 웃옷을 집어들고서는 광주시내 병원과 야산을 뒤지고 또 뒤졌다.

‘살아서만 돌아와달라’는 최씨의 간절한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5월31일, 임씨는 다른 민간인 희생자 7명과 함께 교도소 관사 뒤 흙구덩이에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임씨는 구두 한 짝과 속옷만 입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어깨, 왼쪽 무릎,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고 구타로 온몸에 멍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최씨는 숨진 임씨를 차마 볼 수 없었다. 정신을 잃고 시동생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최씨는 임씨를 담양 선산에 안장했다가 1997년 5·18국립민주묘지로 이장했다.

이장 당일 하늘도 함께 울었다. 최씨는 삼남매와 함께 그동안 겪었던 고통과 설움을 토해내듯 흐르는 눈물을 빗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최씨는 임씨의 제사를 지내고 1981년 친정인 부산에 돌아갔을 때도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친정 식구들까지 미행당하자 다시 담양으로 돌아왔다.

5·18희생자를 폭도로 날조한 신군부 세력의 끈질긴 역사 왜곡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이겨내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최씨는 1999년 5·18기념재단에 증언을 통해 “자식들의 눈물 가득한 눈망울이 살게 만들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슬픔과 고통, 분노를 알지 못한다. 남편을 잃고 생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장사를 하며)악착같이 살았다”고 했다.

최씨는 이날 기념식에서 이같은 사연을 편지로 낭독한다. 정부는 5·18 유가족의 아픔을 공감·치유하겠다는 뜻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임씨의 사례는 신군부 세력이 학살한 민간인을 몰래 파묻은 뒤 이를 은폐하려고 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1980년 5월21일부터 23일까지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는 담양·순천 쪽으로 이동하는 차량·시민에게 마구 총격을 가했다. 군 기록상 당시 민간인 희생자는 27~28명으로 추정된다.

5·18직후 교도소 관사 뒤에서는 시신 8구, 교도소 앞 야산에서는 시신 3구가 암매장 상태로 발견됐다. 단순 계산으로도 16~17명의 신원과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군은 당시 희생자 주검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지문을 잘라냈고, 희생자를 교소도 습격자로 둔갑시켜 역사를 왜곡해왔다.

[광주=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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