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에 맞선 광주시민 이름을 역사에 기록했으면… ”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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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5·18’이란…]<3> 참상 목격한 박종수 치과의원장
광주서 개원후 청소년 무료치료
‘사랑의 식당’ 복지법인 대표 맡아…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환자 진료

환자 3만여 명을 무료로 치료한 박종수 치과의원 원장은 무료급식소 사랑의식당을 운영하는 복지법인 ‘분도와 안나 개미 꽃동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 원장은 사랑의식당에서 평소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환자 3만여 명을 무료로 치료한 박종수 치과의원 원장은 무료급식소 사랑의식당을 운영하는 복지법인 ‘분도와 안나 개미 꽃동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 원장은 사랑의식당에서 평소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경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박종수 치과의원 원장(80)은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방향으로 총을 쏘는 것을 목격했다. 5․18기념재단은 “21일 하루 동안 광주에서 시민 6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밝혔다. 그의 병원은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직선거리로 70여 m 떨어져 있었다. 그는 “시민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워 진료를 할 수 없었다. 그날 금남로에서 집단발포라는 광주의 비극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당시 광주시민 수만 명은 18일부터 사흘 동안 이어진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전남도청 앞에 운집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공수부대를 배치했다. 신군부의 군홧발에 전국이 숨을 죽였지만 광주는 달랐다. 시민들이 폭압에 항거하며 일어서자 공수부대는 집단발포 이후 조준사격을 해 사망자가 속출했다.

박 원장은 ‘우리 국군이 어떻게 국민을 살상할 수 있느냐’며 분노했다. 충남 논산 출신인 그는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1971년부터 2년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부 치과과장과 1974년 국군 광주통합병원 치과부 보철과장을 지냈고 소령으로 예편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집단발포 직후 천주교 호남성당으로 달려갔다. 교인들에게 “금남로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간다”고 외쳤다. 윤공희 광주대교구장과 고 조비오 신부 등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의 만행을 막아달라고 했다. 교인들과 함께 ‘광주 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군부는 만행을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금남로에 갔다. 공수부대는 성난 민심에 놀라 21일 오후부터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박 원장은 5월 24일 항쟁 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에서 진료를 하려 했으나 시민군은 최후의 항쟁을 의식한 듯 정중히 사양했다. 3일 후 광주는 진압됐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81년 5월 18일 박 원장은 광주 서구 화정동 피정의 집에서 열린 천주교 전국 평신도사도직 협의회에서 “5·18은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의거였다”는 결의문 작성을 주도했다. 경찰관들이 에워싸고 감시하고 있었지만 용기를 냈다. 당시 광주시민이 폭도로 매도되고 있었지만 평신도사도직 협의회는 ‘광주 시민은 공수부대원의 만행에 의롭게 맞선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고 김수환 추기경 집무실에 보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태순 신부(82·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는 당시 서울대교구 사무국장 신분으로 참석했다. 오 신부는 “종교인, 민주인사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모인 평범한 사람들이 5·18은 민주화를 위한 항거였다고 처음 평가하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이후 5·18구속자를 진료하거나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등 광주를 위해 헌신했다.

박 원장은 1965년 치대 본과 졸업반 때부터 의료 봉사활동을 했다. 1974년 광주에 치과병원을 개원한 이후 구두닦이 등 직업 청소년들을 무료로 치료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광주 남구 무료급식소 ‘사랑의 식당’을 설립한 고 허상회 원장(2016년 작고)이다. 박 원장은 허 원장이 별세한 뒤 사랑의 식당을 운영하는 복지법인 ‘분도와 안나 개미 꽃동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55년 동안 3만여 명을 무료 진료한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5·18 당시 광주 시민 모두가 한마음이었습니다. 정의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하나로 뭉친 광주 시민들의 이름을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이나 광주시 역사에 수록해 보전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당시 대동세상을 이뤘던 시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제 광주가 ‘제2의 고향’인 박 원장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바라는 소망이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박종수#광주#5·18민주화운동#오태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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