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렌다, 대한민국 방사광가속기[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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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대학원 시절 실험실에 진공증착 장치가 있었다. 얇은 나노박막을 제작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외국에서 차관 형식으로 대학에 빌려준 장비였다. 당시 이 고가의 장비는 국내에 유일했다. 전국 대학에서 이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연구실로 찾아왔다. 주말도 없이 이 장비는 가동되었고, 기적적으로 국내 최초로 태양전지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끼리는 이 장비를 ‘우주선’이라고 불렀다.

이 우주선으로 많은 학생들이 학위를 받을 수 있었고, 엄두도 못 내던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할 수 있었고, 자신감을 얻은 열정적인 청년 물리학자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 역시 이 장비를 이용해 많은 실험을 진행했고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더 큰 꿈을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30년 전 달나라의 동화 같은 시절 이야기다.

이 우주선은 이제 실험실 구석에 있는 가장 평범한 장비로 학부생들이 사용하는 정도의 실험 장비가 되었다. 요즘 실험 장비들은 더 정밀해지고 복잡해지고 스케일이 커졌다. 일개 대학 실험실이 갖기에는 말 그대로 ‘거대’해진 장비도 많아졌다. 한 사람의 손으로 작동하던 장비들은 이제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정밀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동되고, 얻어진 수많은 결과는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는 처리할 수 없다.

새롭게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청주에 세워진다. 이 가속기를 보유한 나라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이 세 번째다. 꿈같은 일이다. 최초의 가속기는 1932년 영국의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스트 월턴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두 과학자는 이 가속기를 이용해 최초로 원자의 구조를 관찰했다. 그 공로로 1951년 노벨상을 받았다. 원자의 딱딱한 구조를 이해하고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망치로 호두를 깨는 것처럼 원자를 깨뜨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가속기는 양성자나 전자의 강력한 힘을 이용한다. 그 힘이 크면 클수록 원자의 속을 더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가속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원자폭탄의 재료인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가속기는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에 있는 거대입자충돌가속기(LHC)다. 이 거대한 가속기를 이용해 과학자들은 우주를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조만간 이 가속기를 통해 우주 탄생의 비밀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청주에 세워지는 방사광가속기의 목적은 원자를 쪼개는 작업을 하는 가속기와는 다르다. 가속기의 원리는 같지만 가속하는 입자가 방출하는 방사광을 이용한다. 가속이 클수록 방사광의 파장이 짧아져 X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정교한 수술 메스 같은 X선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나노물리학, 반도체, 배터리, 철강, 생명공학, 신약개발, 의학 등 미래 산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실 방사광가속기는 단순한 기계 설비에 불과하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의 열정이 더해지면 어떤 장치로 변모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청주의 방사광가속기 주위로 젊고 열정적인 과학자들이 모여들었으면 좋겠다. 마치 30년 전 달나라의 동화 같은 꿈을 꿀 수 있게 해줬던 우주선처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방사광가속기#청주#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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