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망월동에 왜? 할아버지 품에 안겨 묘역 찾은 기억이…

이형주 기자 입력 2020-05-14 03:00수정 2020-05-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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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5·18’이란…]<1> ‘5·18둥이’ 기태현 씨
1980년 태어난 기태현 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아버지를 잃었다. ‘5·18둥이’인 기 씨는 “5·18에 대한 왜곡과 폄하가 끝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됐다. 하지만 5월의 아픔과 상흔은 여전하다. 진상 규명을 목청껏 외쳤지만 ‘왜 쏘았는지, 왜 찔렀는지, 트럭에 싣고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모른다. 1980년 5월 당시 아버지를 잃은 5·18둥이, 부상자를 치료했던 병원 간호부장, 참상을 목격한 평범한 시민, 5·18 소설가에게 40년이 지난 ‘5·18’은 어떤 의미일까. 이들의 ‘5·18 인생’을 ‘나에게 5·18’이란 제목으로 4회에 걸쳐 싣는다.》

기태현 씨(40)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가 됐다. 아버지 기남용 씨는 195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집안의 장손이었다. 4남 1녀 중 첫째였던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일찍 학업을 접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결혼한 뒤 광주 서구 양동에서 피복상을 하는 이모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980년 2월 아들 태현 씨를 얻고 아내(61)와 평범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연행하자 시골집으로 피신하려고 했다.

태현 씨 가족은 5월 20일 북구 누문동 집을 나섰다. 급하게 짐을 꾸려 나서다 보니 태현 씨 기저귀 가방을 빠뜨렸다. 아버지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다 친구를 만났고 “시민들이 죽어간다. 전남도청으로 가자”는 친구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 아내에게 맡기고 광주 동구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5월 21일 오후 1시 아버지가 탄 트럭이 전남도청으로 나아갈 때 총탄이 쏟아졌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한 것이다. 계엄군들은 차 안의 사람들을 끌어내 진압봉을 휘둘렀다. 발목에 총상을 입은 아버지는 금남로 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급히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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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기충호 씨는 5월 22일 전남대병원에서 아들의 시신을 봤다. 속옷을 겨우 걸친 아들은 온몸이 멍들어 있었고 대검에 찔린 가슴에는 피가 뭉쳐 말라붙어 있었다. 남용 씨는 5월 말 광주 북구 망월동 묘지에 묻혔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이 세상을 뜨자 농사를 접고 광주로 이사했다. 노동일을 하며 손자 태현 씨를 키웠다. 태현 씨는 1984년 할아버지 품에 안겨 아버지 묘를 찾았다고 한다. 태현 씨는 “할아버지는 5월이 되면 술을 많이 드셨다. 4년 전 작고하실 때까지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평생 안고 사셨다”고 했다.

태현 씨는 군 제대 후 대학 2학년으로 복학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휴학한 뒤 공장에 취업했다. 취업 이후 5·18 유가족에 대한 학비지원제도가 생겼지만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서 일하는 태현 씨는 2011년 결혼해 1남 1녀를 둔 가장이 됐다.

태현 씨는 아버지 제삿날과 명절 때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1묘역 1-11번 묘에 붙은 사진으로 아버지를 만난다. 남용 씨 묘는 1997년 이곳으로 이장됐다. 가끔 ‘왜 시민군이 돼 가족을 힘들게 하셨을까’라는 원망도 했었다.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학교에서 “5·18 민주 유공자인 할아버지가 훌륭하신 일을 하셨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자랑스러워하자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와 화해를 한 셈이다.

태현 씨는 5년 전 5·18 관련 기사에 처음으로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 기사에 5·18에 대한 왜곡과 폄하 댓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댓글에 휴대전화 번호를 남겼다. 누구든 전화를 해 5·18에 대해 물어보라는 의미였지만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민주투사’라는 거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5·18 보상금을 많이 받고 유가족이 큰 혜택을 입고 있다는 댓글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를 잃고 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대학을 중퇴한 저의 삶이 이런 댓글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태현 씨는 “5·18에 대한 왜곡이 사라지고 그날의 진실에 대한 논쟁이 끝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기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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