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 중시 ‘학현학파’ 전성시대… 소주성-확장재정 드라이브[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진보 경제학자들 文정부 주류로

이른바 ‘학현학파’로 분류되는 경제 전문가들이 현 정부 출범 이후 경제라인의 주요 직책을 꿰차며 주목을 끌고 있다. 학현학파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겸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의 경제 이론을 따르는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을 말한다. 학현(學峴)은 변 교수의 아호다. 현 정부의 첫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거쳐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홍장표 위원장이 대표적이다.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강신욱 통계청장,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원승연 금융감독원 부원장 등도 학현학파로 분류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최근 공직 각 분야에 빠르게 포진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실질적인 싱크탱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올해 3월 박복영 대통령경제보좌관에 이어 지난달 주상영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까지 새로 임명되면서 학현학파의 활동 보폭이 넓어지고 있다. 이들의 학문적 배경과 철학, 정책 지향점에 대한 관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 변형윤 교수 중심 인맥 그룹으로 출발

학현학파는 서강학파와 더불어 한국 경제학계의 양대 학파로 꼽힌다. 서강학파는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1970년 경제개발 전략을 주도했던 고위 경제관료와 그 맥을 잇는 경제학자들을 일컫는다. 서강학파가 성장을 중시하는 반면 학현학파는 분배에 방점을 둔다. 양적 성장보다 질적 발전이 중요하며 소득분배나 형평성, 공정성이 더 많이 고려돼야 한다고 본다. 또 박정희 정권 이후의 압축 성장이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다만 두 학파 모두 공통의 방법론이나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구축된 정통 학파라기보다 비슷한 학문적 성향의 인적 네트워크 성격이 강하다. 변 교수 스스로도 지난해 발간한 회고록에서 “동질적인 철학이나 이론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학파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학현학파로 분류되는 이들의 생각도 그렇다. 장지상 원장은 “학현학파나 서강학파 모두 각자 비슷한 생각을 갖고 같이 공부한, 일종의 그룹 정도로 보는 게 맞다”고 했다.

1982년 문을 연 ‘학현연구실’은 학현학파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가 해직된 변 교수가 창립했다. 이 연구실을 중심으로 활동한 경제학자들이 초기 학현학파로 분류된다. 연구실은 1993년 사단법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확대돼 지금도 진보 경제학자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변 교수는 소득 재분배와 균형적 경제발전을 강조해 왔다. 그의 좌우명인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은 영국 경제학자인 앨프리드 마셜의 저서에 나오는 표현이다. 마셜은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대표적인 주류 경제학자이지만 분배를 중시하고 빈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변 교수 역시 대화록인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을 앓다’에서 “우리 연구실이 지향하는 방향은 인간 중심의 경제학”이라며 “주류 경제학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빈곤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연구자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했다.

서강학파를 이끄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2004년 국회에서 성장과 분배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을 때 변 교수는 “시장경제가 만능이 아니다. 결함을 치유하려면 사회 안전망과 분배가 지속적으로 강조돼야 한다”고 했다. “빈곤 계층을 배려하지 않고는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어렵다”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강조했다. 또 “분배론자들은 마치 성장을 하지 말자는 것처럼 오해받는데 성장률이 다소 낮더라도 사회 안전망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 김대중·노무현 정부 거치며 주류로 거듭나

오랫동안 경제학계의 비주류에 머물던 학현학파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건 김대중(DJ) 정부 때부터다.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가 대통령경제수석으로 임명된 것이 신호탄이었다. 당시 DJ 정부에 참여했던 강철규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진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윤원배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학현연구실 출신이다. 변 교수는 직접 ‘제2의 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태동 경제수석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한은 금통위원도 지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학현학파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강철규 전 위원장이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복귀했고 DJ 때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경제노동분과 위원장을 지낸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는 2004년 노동부 장관에 올랐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과 대통령정책특별보좌관을 역임한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역시 학현연구실 멤버다.

이들은 권력의 핵심으로 빠르게 거듭났다. 2006년 2월 청와대가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세칭 서강학파 계열의 학자들이 경제이론으로 뒷받침해 준 불균형 전략(압축성장)은 스스로 지속 불가능한 성장모델이었음을 입증하며 1997년 끝났다”고 선언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2009년부터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의 보수 정권이 9년간 이어지면서 서강학파 경제학자들이 다시 중용됐고, 학현학파의 존재감은 약해졌다.

○ 학자마다 스펙트럼은 다양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학현학파의 분배 중심 경제정책은 다시 힘을 얻었다. 홍장표 위원장, 장지상 원장은 학현연구실 세미나의 주요 멤버였고 강신욱 청장, 박복영 보좌관, 원승연 부원장, 이제민 부의장도 변 교수의 제자다. 일각에서는 장하성 전 대통령정책실장, 박종규 전 대통령재정기획관도 같은 계열로 분류하지만 이들은 변 교수와 직간접적 인연이 없어 원칙적으로는 학현학파라 보기 어렵다.

홍장표 위원장은 현 정부 경제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 소득주도성장(소주성)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자신의 논문을 통해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의 역할을 강조하고, 소득분배가 개선되면 투자나 수출도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소주성 이론을 토대로 현 정부는 2018, 2019년 2년 동안 최저임금을 급격하게(27.3%) 인상했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홍 위원장은 2018년 언론 인터뷰에서 “소득주도성장은 일종의 불평등을 해결하자는 정책 패러다임”이라며 “과거에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므로 논란이 이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재벌 개혁을 포함한 공정경제는 소주성과 혁신성장의 바탕이 된다고 봤다.

이제민 부의장은 지난해 1월 대통령의 ‘경제 멘토’ 격인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에 임명된 뒤 확장재정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문 대통령에게 “지난 2년간 재정을 긴축해온 측면이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재정 확장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연세대 교수였던 2018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1주년 정책 심포지엄에선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의 몫이 줄어드는 대신 기업, 외국인 자본이 거둔 이익이 늘어났다”며 재벌과 외국자금,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학현학파 내부에서도 경제정책의 세부적인 방향이나 방법론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지난해 5월 서울사회경제연구소가 개최한 정부 출범 2주년 정책 심포지엄에서 주상영 금통위원(당시 건국대 교수)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기술혁신과 신제품 개발 경쟁이 중요하다. 소득주도성장론에는 이런 생산론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소주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창조적 혁신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승연 부원장은 “같은 학현학파라고 해도 역사가 30년에 걸쳐 있어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다. 경제가 질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분배를 더 중시한다는 큰 틀의 공감대는 있지만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을 모두 학현학파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 “분배에만 치우쳐 균형 상실” 우려도

물론 보수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은 학현학파의 부상에 대한 우려가 크다. 재정과 금리, 소득분배 등 각 분야의 경제정책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 내부에서 견제 기능이 사라지면서 정책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게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현 정부 초기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맡은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가 소주성의 속도 조절을 주문하며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다 물러난 것이 한 사례다.

현 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정부 내에 학현학파 외에도 다양한 경제 전문가들이 있는데 이들만 너무 부각되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학현학파가 아닌 한 전직 청와대 경제라인 관계자는 “청와대 내부에서 소득주도성장 못지않게 혁신성장을 균형 있게 추진하고 있는데 최저임금 인상 등 일부 정책들만 지나치게 부각됐다”며 “현 정부의 정책이 한쪽으로 경도되고 있다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세종=주애진 jaj@donga.com·남건우 기자
#학현학파#분배#소득주도성장#확장 재정#진보 경제학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