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만의 “나는 무죄다”[횡설수설/이진영]

이진영 논설위원 입력 2020-05-07 03:00수정 2020-05-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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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해 1995년 출간한 ‘법원사’에 나오는 사건의 주인공 최말자 씨(74)가 6일 부산지방법원에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는 56년 전인 1964년 5월 6일 집 앞을 서성이던 낯선 남자가 성폭행을 시도하자 그의 혀를 깨물어 1.5cm 잘라낸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최 씨의 나이는 18세, 상대는 21세였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신체의 완결성’이라는 법익(法益)이 충돌하는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은 형법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사례다. 형법상 정당방위가 성립하려면 ①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을 것 ②방어하기 위한 행위일 것 ③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 등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중 ③번의 ‘상당성’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인데 혀 절단 사건들은 이 대목에서 논란을 빚어왔다.

▷정당방위로 인정받은 가장 유명한 판례는 1988년 경북 영양군에서 가정주부가 한밤중 귀갓길에 치한의 혀를 깨물어 고소당한 사건. 1심에선 ‘혀를 깨물어 놀라게 하는 정도로 그쳐도 될 것을 물어뜯어 혀를 잘랐다’며 유죄가 나왔다. 여성 단체는 ‘여성의 인권보다 남성의 혀를 중시하는 남성 중심적 시각을 드러냈다’고 비판했고, 항소심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1990년 영화(‘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로 개봉했는데 각본을 쓴 이는 28년 후 성폭력으로 징역형을 선고받는 이윤택 연극연출가다.


▷반면 2016년 인천의 라이브카페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남성이 강제로 혀를 들이밀자 깨물어 6cm 잘려나가게 한 주부는 국민참여재판 끝에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14년엔 남성이 강제 키스하려는 여성의 혀를 깨물어 2cm 잘라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은 “몸을 밀쳐내는 등의 방법으로 제지할 수 있었다”며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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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씨는 56년간 ‘멀쩡한 남자를 불구로 만든 가해자’로 몰려 살아왔다. 성폭행을 시도했던 남자는 남의 집에 침입해 협박한 죄만 인정돼 최 씨보다 적은 형(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최 씨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중고교 과정을 공부하면서 ‘왜 피해자가 숨어 살아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고, 한국방송통신대에 진학해 당시의 피해 경험을 담아 논문을 썼다. 이를 읽은 학우의 권유로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8년 한국여성의전화에 연락했다. 56년 만의 ‘미투’의 시작이다. 최 씨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진다면 ‘법원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미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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