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총 맞은 여대생이 쓴 일기에 담긴 내용은…

뉴스1 입력 2020-05-04 08:23수정 2020-05-0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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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1980년 5월 그날을 기록한 시민들의 ‘오월일기’ 기증이 잇따르고 있다.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서석고 3학년이던 장식씨의 일기.(광주시 제공) 2020.4.29
“총을 맞은 것보다 허위가 판치는 세계에서 진실을 고수하고 주장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였다.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광주시민이 폭도가 될 수 있느냐.”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그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1980년 5월을 기록한 시민들의 ‘오월일기’ 기증이 잇따르고 있다.

전남대 인문사회대 2학년이었던 김윤희씨 일기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겪었던 경험담과 생각이 오롯이 담겨있다.


김윤희씨는 일기의 서두에 1980년 5월26일부터 7월11일까지 사정으로 인해 45일이나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서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보기로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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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5월26일자 일기에 “27일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들어온다고 했다”며 “8일간의 부끄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고 밝혔다.

이어 “새벽이면 일어날 그 참상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겨우 잠이 들었다”며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꼭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건 오류였다”고 썼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광주 진입과 관련해 당시 본인이 겪은 상황이 묘사됐다. 27일 오전 6시30분쯤 김씨는 일행과 함께 광주YWCA에서 밥을 하던 중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맞은편 벽면에 꽂힌 것을 목격했다.

그 순간 김씨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바닥에 엎드렸지만 등에 뭔가가 꽉 박히며 코와 입으로 많은 양의 피가 나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맞는 순간 당시 김씨는 “아 맞았구나.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수부대원의 인도로 YWCA에서 나와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김씨는 국군광주통합병원에 도착한 뒤를 회상하면서 나의 고달픈 병상 생활이 시작됐다고 표현했다.

김씨는 수술을 받고 병실로 옮겨졌지만 “수술시의 그 고통스러움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라면서도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더한 고통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또 “허위가 판치는 세계에서 진실을 고수하고 주장하기란 정말 힘이 드는 일이었다”며 “폭도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것도 데모의 주동자로, 어이해서 광주 시민이 폭도가 되는 것인지”라고 작성했다.

그는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우리가 총을 들었다고 해서 폭도이냐, 반정부적인 행위를 해서 폭도인 것인지”라며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우리들이 안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 것”이라며 “나에게 준 또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하겠다”고 덧붙였다.

1980년 5월 이후의 상황도 적혀있다. 총탄 수술과 관련해 불편했던 자신의 몸 상태나 계엄사에서 나온 수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도 있다.

6월7일자 일기에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큰 오빠의 얼굴을 봤고, 눈물이 나올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고 했다.

6월11일자 일기에는 계엄사에서 나온 한 수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씨는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침착하게 잘해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또다시 데모를 하겠느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진실 되지 못한 답변을 했다면서 ‘비겁자’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6월24일에는 전남북계엄분소에서도 세 번째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앞에 두 번의 조서 상황과는 달랐고, 살얼음 상황이 연속으로 이어졌다고 썼다.

김씨는 수사관의 마음대로 꾸며지는 조서, 절반 정도 받고 통합병원으로 향했다고 적었다. 6월25일자 일기에는 통합병원으로 온다던 수사관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6월27일에는 매일 석방날 만을 기다렸다면서 박 중위라는 사람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고 적혀있었다. 박 중위는 군인의 입장을 이야기 했고, 김씨는 광주시민의 입장을 이야기 했다고 썼다.

유치장 수감 생활과 관련된 일기도 있었다. 김씨는 “7월2일 오전 11시쯤 통합병원에서 광산경찰서로 옮겨졌다”며 “여기서 다른 언니들을 보니 여태까지 버텨왔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김 순경의 제재로 참을 수 밖에 없었다”며 “유치장이라는 곳은 정말 있을 곳이 못됐다. 깡보리밥에 단무지 몇조각 그리고 변소 냄새 등 참을 수 없이 답답했다. 언니들은 여기서 거의 한달 동안을 어떻게 버텨왔을까”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점심을 먹은 후 계엄분소 보병학교라는 곳에서 정신교육이란 것을 받으러 갔다”며 “투 스타 한 사람이 나와서 강연했다. 한마디로 웃겨주는 이야기들, 맞지도 않는 허위들을 듣고 유치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다음날 김씨는 석방이 됐다. 당시 수사반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협박과 공갈 비슷한 이야기도 들었고, 다시는 데모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김씨와 함께 평범한 가장이었던 민영량씨, 주부 허경덕씨, 서석고 3학년이었던 장식씨가 40주년 5·18을 맞아 진상규명을 위해 자신이 쓴 일기를 5·18 기록관에 전달했다.

(광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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