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의 ‘워룸’ 없었다면 세계는 통제 불능 빠졌을 것”

  • 신동아
  • 입력 2020년 4월 24일 14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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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故이종욱 WHO 사무총장을 보다

[WHO 제공]
[WHO 제공]
● 내부 반대 뚫고 ‘전략보건운영센터’(WHO 컨트롤타워) 설립
● 한센병퇴치팀장(1983)에서 사무총장(2006)까지, 23년 간 WHO에 공헌
● 한센병·소아마비·결핵·에이즈 퇴치에 기여한 ‘백신의 황제’

2019년 12월 31일, 중국 정부는 스위스 제네바 세계보건기구(WHO) 본부에 몇 건의 특이한 폐렴 사례를 보고했다. 발원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화난 수산시장.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올해 1월 7일, WHO가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 보건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바로 그 시각, WHO 본부에서 가장 바삐 움직인 곳은 다름 아닌 ‘이종욱 전략보건운영센터(JW Lee Centre for Strategic Health Operations, 약칭 SHOC)’다. 일명 ‘워룸(War Room)’으로 불리는 이곳은 비상상황 시 가동하는 WHO의 핵심 컨트롤타워다. 365일 24시간 전 세계의 감염병 정보를 모으고, 이를 토대로 즉각적인 대응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사무실 중앙 대형 모니터에 떠 있는 세계지도에는 감염병 발생지별 현황과 의약품 및 의료물자 지원 현황, 각국 공항 상황 등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2004년 말 인도양 대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에 이어 2009년 조류인플루엔자(H1N1),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대유행 등 인류를 위협하는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SHOC 위기대응팀이 가동됐고 발 빠른 대처를 해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 직전까지 소극적 태도와 늑장 대응, 특정 국가에 대한 편향성 등 갖가지 논란을 일으키면서 고(故) 이종욱 전 사무총장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WHO 내부의 반대 속에서도 SHOC 조직을 만든 당사자이자 현장을 중시하던 과거 이 전 총장의 모습이 테드로스 현 사무총장의 행보와 크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경계대응 과정은 아주 신속해야”

이 전 총장이 한국인 최초의 국제기구 수장인 WHO 사무총장에 선출된 것은 2003년 5월 21일 세계보건총회에서다. 2개월간 취임 준비를 마친 그는 직원들에게 새로운 감염병 대유행을 경고하면서 대책 마련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 사스 발발로 인한 위기는 WHO가 감염병 창궐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을 조율하는 핵심 역할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줬다. 사스는 글로벌 질병 감시 체계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글로벌 발병 경계 및 대응 네트워크’ 활동을 해나갈 것이며, 양자 간 또는 다자 간 원조에 대한 국가별 또는 지역별 감시 체계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 전 총장은 그 직후 SHOC의 토대가 될 위기관리센터를 신속하게 만들도록 지시했다. 위치는 사무총장 집무실에서 8개 층 아래에 있는 지하 작은 강당. 센터 구축에 책정된 예산은 500만 달러(60억 원)나 됐다. 2003년 7월 31일 작성된 센터 초안 자료 중 일부다.

“경계 대응 과정은 아주 신속해야 한다. 이 때문에 WHO 시스템 안팎으로 효과적인 실시간 통신과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문 인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조직도를 보면 센터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WHO 운영진과 각 지역사무처, 각국 사무소, 오른쪽으로는 WHO의 각 프로그램과 지역 네트워크, 위험 병원체, 자금 조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들을 연결했다. 피해 국가들의 위치는 센터 바로 아래쪽에 더 가깝게 배치했다.

당시 WHO 본부 내부에선 센터 설치에 회의적인 시각과 반대가 많았다. 이 센터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끝까지 확신하고 열의를 보인 사람은 이 전 총장뿐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초 100일 안에 신속하게 설치하려던 이 센터는 2004년 말에야 완공됐다.

특유의 친화력, 6억 달러 기부 이끌어내

WHO가 이 전 총장 사후 이 센터에 그의 이름을 붙인 건 단지 그가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83년 WHO 남태평양지역사무처 한센병퇴치팀장을 시작으로 사무총장까지 올라 2006년 5월 22일 세계보건총회 개회 당일 사망하기 전까지 무려 23년간 WHO에 남긴 그의 족적과 성과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특히 소아마비와 결핵, 에이즈 등과의 전쟁에서 기념비적인 성과를 남겼다.

이 전 총장이 소아마비 퇴치사업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서태평양지역사무처 질병관리국장에 임명되면서부터다. WHO는 1988년 5월 열린 세계보건총회에서 “2000년까지 소아마비를 퇴치한다”고 선언했다. 서태평양지역사무처는 이보다 5년 빠른 1995년까지 소아마비 퇴치를 천명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 전 총장을 긴급 투입한 것. 이 전 총장은 소아마비 퇴치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인력 동원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 전 총장이 가장 주력한 업무는 바로 자금 조달이었다. 예산이 있어야 소아마비 바이러스 퇴치와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확대할 수 있고, 캠페인을 통해 회원국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국제로터리클럽으로부터 2005년까지 6억 달러(7300억 원) 기부를 이끌어내는 등 상당한 자금을 조달해 소아마비 퇴치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시기 WHO를 이끌던 나카지마 히로시 사무총장이 1993년 재임에 성공한 것도 이 전 총장의 성과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카지마 사무총장은 1년 뒤인 1994년 지역사무처에서 근무하던 그를 스위스 제네바 본부로 불러 중책을 맡겼다. 바로 어린이백신사업과 함께 본부와 지역사무처에 분산된 예방접종 활동의 틀을 새롭게 짤 어린이백신(사업)국장 겸 글로벌백신프로그램국장(총괄국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그를 앉힌 것이다.

WHO, 소아마비 바이러스 ‘3형’ 박멸 선언

이 전 총장은 어린이백신사업의 일환으로 ‘히브(Hib·뇌수막염, b형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 백신을 개발도상국에 보급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예방접종 분야에서는 소아마비 퇴치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0년 지역사무처 시절부터 본부 총괄국장으로 일한 1998년까지 8년 동안 같은 사업을 지속한 이 전 총장은 당시 미국의 유력 과학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으로부터 ‘백신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노력 덕분에 인류는 소아마비가 없는 세상에 한발 다가섰다. WHO는 지난해 10월 24일 세계 소아마비의 날을 맞아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바이러스 3형(WPV3)’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테드로스 총장은 “천연두와 폴리오바이러스 2형 박멸 이후 세계 보건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제 남은 건 ‘폴리오바이러스 1형’뿐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형 바이러스로 인해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는 곳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두 국가 정도다. 이곳은 정치적 분쟁 탓에 WHO가 소아마비 퇴치 프로그램을 펼치기 어렵지만 지구상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완전히 퇴치될 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공중보건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
[WH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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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총장이 그다음으로 맡은 중책은 바로 결핵 퇴치사업이다. 2000년 결핵국장에 오른 그의 최우선 목표는 ‘런던 선언’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1998년 3월 런던에서 소집된 WHO 임시위원회에서 비정부기구와 기업, 정부, 기부자의 노력을 한데 모으자고 결의한 것. 그 연장선에서 2000년 3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는 DOTS(직접관찰치료전략·Direction Observed Therapy-Short Course) 치료를 확대할 각국 및 국제 협력체를 구성하고, 2005년까지 70%의 발견율과 85%의 치료율 달성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또 이를 위해 한 해에 12억 달러(1조5000억 원)의 예산을 조달하기로 합의했다.

이 전 총장은 글로벌 백신 프로그램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2001년 초 글로벌약품조달기구를 설립해 결핵 퇴치사업 전면에 나섰다. 그 결과 감염 발견율은 60%, 치료율은 84%로 목표치에 거의 육박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영국 유명 연구기관인 ‘건강부문발전연구소(institute for health sector development)’는 이에 대해 “대단한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2003년 WHO 사무총장 자리까지 올라간 이 전 총장이 가장 주력한 일이 ‘3 by 5’ 캠페인을 내건 에이즈 퇴치사업이다. 2005년 말까지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선진국에만 집중되던 에이즈 치료제를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으로까지 확대 공급하기 위한 그 첫걸음이었던 것.

이 전 총장은 연간 40억 달러(4조9000억 원)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며 기부 활동에 동참해 줄 것을 설득했고,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노르웨이, 빌 게이츠 재단 등 각국 정부와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10만여 명의 보건 종사자에 대한 훈련과 1만 개에 달하는 진료소를 재조직해 세계 에이즈 치료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바이러스 전문가인 벨기에 출신 피터 피오 박사는 “WHO가 본연의 역할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됐으며 2008년에는 실제로 300만 명까지 치료를 받게 했다”고 말했고, 로버트 비그홀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교수는 “두창 퇴치에 필적할 만한 공중보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이 제공한 WHO 자료에 따르면 2003년을 기점으로 에이즈와 관련된 사망률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2018년 말 기준으로 사망률은 2000년 대비 45%, 신규 발생 환자 수는 37%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KOFIH는 이 전 총장이 WHO 사무총장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2006년 만들어진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이다.

AI 이후 ‘팬데믹 6단계 경보체계’ 제정

질병 확산 범위에 따라 발령하는 ‘대유행병(Pandemic) 6단계 경보체계’ 역시 이 전 총장이 재임 시절 만들었다. 전병율 전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은 “이 단계별 대응전략이 나온 직접적 계기는 2004년의 AI(조류인플루엔자)였다. 이 전 총장이 세계적 확산을 막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생전 뛰어난 전문성과 리더십으로 ‘백신의 황제’ ‘행동하는 사람’ ‘아시아의 슈바이처’ 등으로 불린 이 전 총장. 만약 그의 노력과 성과가 없었으면 지금 같은 코로나19 위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추무진 KOFIH 이사장은 “코로나19 비상 상황에 대한 각국의 대처는 물론 국제적인 조정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것”이라며 “많은 국가의 반대와 비판 속에서도 세계적 대유행에 대한 이 전 총장의 예견과 선제적 대응 전략이 다시금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20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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