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비대위 8번째…통합당, 전권·쇄신 없으면 또 악순환

  • 뉴시스
  • 입력 2020년 4월 22일 13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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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참패하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비대위
박근혜·김종인 비대위가 성공 모델로 꼽혀
비대위원장에 전권 줄수록 당 쇄신 힘 실려

미래통합당이 4·15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참패를 당하자 ‘비상 체제’로 전환하고 당을 수술대에 올려 쇄신에 나선다.

대부분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참패할 때마다 공식처럼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출범해 돌파구를 찾지만 반대로 당 내분만 가열돼 성과없이 문 닫는 경우도 있다.

역대 비대위를 살펴보면 대체로 얼마나 많은 힘이 실리느냐가 성패를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했다. 비대위원장에게 전권이 주어질수록 당 쇄신에도 무게감이 실리고 속도가 붙어 상당한 성과를 낸 것이다. 대표적인 모델로 2011년 박근혜 비대위와 2016년 김종인 비대위를 들 수 있다.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을 거쳐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비대위 역사는 ▲2010년 6월 김무성 비대위 ▲2011년 5월 정의화 비대위 ▲2011년 12월 박근혜 비대위 ▲2014년 5월 이완구 비대위 ▲2016년 6월 김희옥 비대위 ▲2016년 12월 인명진 비대위 ▲2018년 7월 김병준 비대위로 이어져왔다.

김종인 비대위가 곧 출범하게 되면 여덟번 째 비대위가 된다. 최근 10년새 거의 매년 비대위를 출범할 만큼 위기가 끊이질 않았지만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비대위가 가장 성공적인 비대위로 거론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시절 2004년과 2011년 비대위원장을 두 번이나 맡았다.

2004년 ‘천막당사’로 무너진 당을 재건했던 박 전 대통령은 7년 후 당에 위기가 찾아오자 다시 비대위원장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2011년 말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당 보좌진의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개입 의혹 등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흔들리자, 한나라당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비대위를 띄웠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변경해 당 분위기를 쇄신하고, 현역 의원의 25%를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인적 교체로 당 내 세력을 물갈이하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컷오프(공천배제)에 강력 반발한 친이(친이명박)계를 중심으로 비대위를 두고 특정 계파의 사당화, 공천 학살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공천권을 잡고 치른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전체 의석수의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해 원내 1당의 자리를 지켰다.

박 비대위원장은 총선을 계기로 당에서 인정받은 리더십과 탄탄한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면서 대권에 도전해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박근혜 비대위의 성공이 총선은 물론 대권가도의 초석을 다지는 기반이 된 것이다.

이같이 박근혜 비대위가 ‘성공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수 진영에서 평가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근간으로 당시 박 비대위원장이 당에서 대체할 만한 후보군이 없는 유력 대권주자라는 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박 비대위원장이 당의 장악력이나 재정비가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측면도 여기에 있다.

반면 통합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시절에는 실패한 비대위로 평가받고 있다.

새누리당은 20대 총선 참패로 수개월 간 지도부 공백사태가 발생하자, 2016년 6월 김희옥 전 헌법재판관을 비대위원장으로 앉혀 당 혁신을 맡겼다.

친박(친박근혜)계는 김희옥 전 재판관을, 비박(비박근혜)계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각각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 전 재판관이 수락하면서 새누리당 임시지도부인 혁신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었다.

김희옥 비대위는 출범하기 전부터 잡음이 일었다. 특히 총선 참패 이후 당의 진로를 놓고 혼선을 겪었다. 새누리당은 혁신위와 비대위 체제의 ‘투트랙’으로 가동하기로 하고 김용태 의원을 혁신위원장으로 내정했지만, 친박계의 조직적인 보이콧 속에 상임전국위 추인이 무산되자 ‘혁신비대위’로 일원화했다.

또 비대위 출범 후에 김광림, 권성동 등 친박계와 비박계를 배분한 듯한 모양새로 비대위원을 구성했지만, 이혜훈 등 유승민계 의원들과 김세연 등 소신파 의원들의 참여가 배제되면서 혁신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많았다.

출발부터 불안했던 비대위는 김 전 재판관이 친박과 비박 간 끊이질 않는 계파 갈등을 제압하지 못하면서 결국 당 혁신을 내건 비대위는 두 달 만에 문을 닫았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4개월 만에 다시 비대위 체제로 전환했다. 갈릴리교회 원로목사였던 인명진 전 윤리위원장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고 다시 쇄신에 나섰다.

인명진 비대위는 당명을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변경하고 분위기 쇄신에 나섰지만, 탄핵 후유증으로 비박계 중심의 잦은 이탈로 인해 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지면서 개혁의 동력을 떨어뜨렸다.

인명진 비대위는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내세우고 사실상 친박계 청산에 나섰으나 정족수 미달로 상임전국위원회를 열지 못하는 등 비대위 구성부터 친박계 반발에 부딪혀 난관에 봉착했다. 친박계 좌장·실세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에 대한 징계도 당원권 정지에만 그치자 당 안팎에선 과감한 인적 쇄신과는 거리가 먼 혁신 아니냐는 비판이 불거졌다. 결국 인명진 전 비대위원장도 공고한 친박의 벽을 넘지 못한 채 3개월 만에 당을 떠났다.

자유한국당은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다시 비대위 카드를 꺼냈다. 지방선거가 끝난 지 한 달여 만에 친노(친노무현) 출신이자 반박(반박근혜) 인사인 김병준 비대위를 구성했다.

김병준 비대위는 반공보수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무너진 보수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인적 청산, 공천시스템 개혁 등을 추진하고 당을 안정궤도에 진입하는 발판을 마련했지만, 당의 고질적인 계파 갈등이나 인적 청산과 같은 과감한 쇄신은 부족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김 위원장의 대중을 향한 흡인력이 낮은데다 공천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당권을 갖지도, 당에서 권한을 부여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 의원들은 선출되지 않은 리더십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당내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점이 가장 큰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면서 김병준 비대위도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통합당은 여권에서 대표적인 성공모델로 평가받는 김종인 비대위를 참고할만 하다.

20대 총선을 앞둔 2016년 1월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직접 나서 새누리당 비대위원 출신인 김종인 전 의원을 비대위 대표로 영입했다. 김종인 비대위는 이해찬, 정청래 등 친노 핵심 인사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안보와 경제 정책에서도 우클릭하는 모습으로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장해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원내 1당으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은 민주당에 뿌리가 없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과 지지를 동력으로 삼아 당 쇄신을 과감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당의 안정된 기반 덕에 문 대통령도 대권에 도전해 성공할 수 있었다.

통합당을 수술대에 올리게 될 김종인 비대위도 성공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통합당은 황교안 대표마저 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난 상태다. 과거처럼 당내 계파의 최고 수장이던 박근혜·문재인과 같은 ‘기둥’이 없어 최대주주의 지원을 받긴 힘든 실정이지만, 친박계가 와해되면서 계파 색채나 계파 갈등도 줄어든데다 대선을 앞둔 중요한 시점인 만큼 당 내에선 비대위원장에게 킹 메이커로서의 역할도 일정 부분 기대하고 있어 김종인 위원장에게 전권이 주어질 경우 당 체질 개선에 과감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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