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호의[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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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이익 좇게 하는 현금공약… 신뢰-협력의 건강한 유전자 부정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세일러 교수의 실험이다. 경영난에 처한 기업이 임금을 삭감할 때 나타나는 반응을 설문했다.

#직원 임금을 7% 줄이기로 결정했다. 물가상승률은 0%다. 공정한가, 부당한가.

“공정하다” 38%, “부당하다” 62%.

#직원 임금을 5% 올리기로 결정했다. 물가상승률은 12%다. 공정한가, 부당한가.

“공정하다” 78%, “부당하다” 22%.

두 상황 모두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은 7% 줄어든다. 그럼에도 명목임금이 깎이는 건 부당하게 여기고, 물가상승률보다 낮더라도 명목임금이 오르면 공정하게 느낀다. 실험이 보여주듯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민감하다. 여기에 “왜 나만 덜 받느냐”는 분배의 문제가 결합되면 계층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번 총선에서 여야는 긴급재난지원금을 미끼로 이런 심리를 파고들었다. 당초 정부는 4인 가구 기준 최대 100만 원을 소득 하위 50%에게 지급하자고 했지만 여당이 이를 70%로 높였다. 나머지 30%를 어떻게 걸러내느냐는 문제가 불거지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0%로 상향 조정했다. 금단의 영역처럼 보였던 100% 라인이 깨지자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한발 더 나가 국민 1인당 50만 원씩 주자고 했고, 어느 지자체장은 1인당 100만 원을 내걸었다.

소비쿠폰이나 식료품 할인구매권(푸드스탬프)은 많은 나라에서 도입하는 긴급처방이다. 따라서 재난지원금을 상품권 형태로 전 국민에게 나눠준다는 방안 또한 전혀 무리한 대책이 아니다. 하지만 선거와 결합되면서 논의 과정과 의도가 고약하게 변해버렸다.

100% 지급안의 명분은 행정적 필요 때문이었다. 재난지원금은 긴급성, 신속성이 요구되는데, 수급 대상자를 제한해 놓으면 이를 분별해 내는 데 더 큰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나온 50% 지급안이 긴급성, 신속성을 충족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 복지체계는 소득 하위 50%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생계급여(30% 이하), 교육급여(50% 이하) 등이 이 틀에서 이뤄지고 있다. 즉, 50% 이하 소득자에 대한 전달체계가 이미 갖춰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위 50%를 빨리 지원하고,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나머지에 대해선 추후 시간을 갖고 추진해도 될 일이었다. 여당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이유다.

황교안 대표의 1인당 50만 원 주장도 선거용이라는 평가 외에 다른 설명을 하기 어려워 보인다. 전 국민에게 이 돈을 주려면 26조 원이 든다. 아시아나항공 10개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선거철이 아니었다면 보수야당이 무엇을 선택했을까.

다시 세일러 교수가 소개한 실험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10명에게 각각 5만 원(편의상 원화로 바꿨다)과 빈 봉투를 줬다. 피실험자가 5만 원 중 일부를 봉투에 넣어 기부하면 실험자가 그 금액만큼 돈을 더해 10명이 나눠 갖게 한다. A가 1만 원을 기부하면 실험자가 1만 원을 더한 2만 원을 10명에게 2000원씩 분배하는 것이다. A는 1만 원을 기부해 2000원만 돌려받지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기부를 하면 전체 파이가 커진다. 한국을 포함해 각국에서 실험한 결과 사람들은 평균 2만5000원을 기부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 경우 A의 최종 자산은 7만5000원이 된다.

실험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신뢰와 협력의지 또한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동안의 위기를 헤쳐 온 건 이런 사회적 유전자 덕분이다. 그럼에도 위기를 핑계 삼아 현금 뭉치를 흔들어대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들의 호의가 많이 불편하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리처드 세일러#총선#긴급재난지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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