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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동아플래시100]블랙리스트 필자 글 삭제? 그럼 우린 다른 글 또 실어!

입력 2020-04-03 11:40업데이트 2021-01-2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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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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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열(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 힘듭니다. 흔히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라 하지만 철학, 과학, 종교, 역사, 사회심리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습니다. ‘동아플래시100’ 코너에서 소개했던 국내 첫 서양음악회의 주인공 류겸자(야나기 가네코)의 남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조선을 사랑한, 조선인의 벗’이라는 말에 가장 애착을 가졌을 것 같네요.

23세 때인 1912년 도쿄의 한 박람회에서 조선 도자기를 처음 접한 류종열은 2년 뒤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華白磁秋草文角壺·풀 문양을 새긴 각진 청화백자)를 본 뒤 조선예술에 빠져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합니다. 1916년 첫 조선 방문 때 석굴암을 답사하고는 “불멸의 힘, 불후(不朽)의 미(美)가 있다”고 극찬했습니다.

조선의 예술과 조선인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던 류종열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있다는 비극을 듣고 그 해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함’이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인 염상섭은 이 글을 보고 우리말로 옮겨 1920년 4월 12일자부터 2면에 6회 연재합니다. 학계 일각에서는 류종열이 조선예술을 ‘비애(悲哀)의 미(美)’로 규정해 패배주의를 조장했고, 폭력이 아닌 ‘정애(情愛)’를 호소해 그가 일제 문화정치를 도왔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인을 생각함’을 뜯어보면 그의 참뜻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제의 교육정책을 비판한 부분이 삭제된 류종열의 기고 ‘조선인을 생각함’ 4회.

4월 13일자 2회에는 ‘조선인을 괴롭힌 것은 우리의 선조였다. 조선정벌은 고대의 무사가 그들의 정복욕을 위해 기획한 죄행이었다. … 오늘날 조선의 고 예술이 폐퇴하고 파괴된 것은 왜구의 죄행’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신의 선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리를 ‘왜구’, 그들의 침략을 ‘정복욕에 눈먼 죄행’이라고 맹비난한 겁니다. 15일자 4회에서도 류종열은 “일본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조선인의 자유와 독립을 박탈했다”고 단언한 뒤 교육문제를 언급하며 “일본의 도덕과 일본 황실의 은혜를 교육하며 조선인에게 약탈자를 존경하라는 것은 기이하고도 모순에 찬 소리”라고 일갈합니다.

이런 글을 쓴 필자도 대단하지만, 창간한지 보름도 안 된 신생 신문이 이를 발굴해 게재한 것은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결국 총독부는 교육문제를 다룬 4회의 일부를 삭제하도록 했습니다. 같은 날 발매금지된 3면 기사 ‘평양에서 만세 소요’까지 한꺼번에 두 건이나 제재를 가한 겁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1920년 창간한 3개 민간신문으로도 첫 제재였습니다.
이전공사를 하기 직전인 1926년의 광화문. 총독부는 당초 신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헐 계획이었으나 동아일보가 류종열의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연재한 것을 계기로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이전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을 생각함’의 연재가 4월 18일 끝나자마자 다음날부터 류종열의 두 번째 기고 ‘조선 벗에게 드리는 글’을 실었습니다. 총독부가 ‘블랙리스트’에 올린 필자의 또 다른 글을 보란 듯 게재한 것이죠. 4월 20일자 2회에는 ‘노상을 지나는 사람의 머리는 앞으로 떨어지고, 고통과 원한이 미간에 나타난다. 백성은 햇빛을 피해 검은 그늘에 모여드는 것 같다’는 음울한 표현이 나오는데 총독부는 이를 빌미로 더 이상의 게재를 금지합니다.

동아일보는 다시 1922년 8월 24일자부터 류종열의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5회 연재했습니다. 일제가 경복궁 안에 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버린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을 의인화해 비통해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계기로 광화문 철거 반대여론이 국내외에 들끓었고, 결국 총독부는 광화문을 이전하는 것으로 대신해 최악만은 피하게 됩니다.
세상을 떠난 류종열 씨 대신 문화훈장을 받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아들 류종리(오른쪽) 씨가 1984년 9월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을 예방해 환담하고 있다.

류종열은 1961년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의 문화예술을 보존하고 널리 소개한 공로가 인정돼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1984년 한국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습니다. 그때 부친을 대신해 훈장을 받은 그의 아들 류종리(야나기 무네미치)는 동아일보를 방문해 “동아일보가 선친에게 베풀어준 호의와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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