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의 공범자[동아 시론/허지원]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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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륜 반문명적 성착취 범죄자들
자신은 피해자와 떨어져 있다고 착각
자기 합리화하고 반성 않으며 범죄 양산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정신병리 수업 중 특정 정신병적 장애를 설명할 때 꼭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다. “환각과 망상에 압도되어 나체로 길을 나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뉴스들이 있다면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하며, 이를 조롱하거나 해당 영상을 공유하는 것은 이들의 상태를 고려할 때 반윤리적이며 폭력적인 일입니다.” 사실이다. 설사 그 사람이 11세기 영국 코번트리 지방의 17세 고다이바 백작부인처럼 본인의 의지로 한 지역을 나체로 다닌다 해도, 우리는 응당 우리의 눈을 가리거나 우리의 겉옷을 벗어 그를 감싸야 한다. 그것이 인륜이고 문명이다.

2017년부터 꾸준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미디어에서 이야기되던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의 주범들이 차례로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범죄의 정도와 연루된 인원수는 일반인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을 아주 많이 벗어났다. ‘추적단 불꽃’과 ‘리셋’, 그리고 피해자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수만 수십만의 동시접속자 중 어린 피해자들을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우려 했다는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이 이 정도로 반인륜적이며 반문명적 행태로 진행되었던 것은 그간 아무 접점이 없이 살아오던 수십만의 사람들이 텔레그램을 통해 가상의 공간에 모여 동시에 범죄를 공모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에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해자들은 이런 가학적 범죄 행위에서 본인은 한발 물러서 있다고 착각하며 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윤리적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심리적 기제를 연구한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스탠리 밀그램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거리를 가학행위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본다. 즉, 피해자와의 거리가 멀거나 피해자에 대한 가혹행위를 전달하는 제3의 인물이 개입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타인에게 더욱 잔인해졌다. 텔레그램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는 간접적으로 범죄행위의 지시를 내리거나 멀리 떨어져 관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더욱이 이들 성 착취 범죄자들은 누구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적극적으로 해당 공간을 검색하고 주범이 요구하는 인증 방식을 거쳐 가상화폐 입장료를 내며 범죄 현장으로 들어섰다. n번방에 마침내 들어서 보니 여러 개의 방에 자신과 같은 의도를 가진 수십만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일시에 목도할 때 최소한의 윤리적 경계는 사라진다. 이들은 또한 아무 이유나 붙여 피해자들을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들’ 혹은 ‘노예’로 칭하며 자신의 범죄행위를 정당화한다.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최종 해결책’으로 명명했듯, 일말의 죄책감을 방지하고 자신의 범죄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자와 심리적 거리를 두는 이 전략 역시 범죄가 극단적 행태를 띠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와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n번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해나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분명한 범죄 사실을 ‘일부 혈기왕성한 집단의 일탈’이나 ‘몹쓸 짓’으로 칭하려는 “말하기의 무능함”, 본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유의 무능함”, 피해자에게도 이 범죄의 책임이 있지 않냐며 공감을 보이지 못하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 한국 사회에 만연해왔다. 이러한 무능함은 결국 이 상투적이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악을 재생산하는 거대한 암묵적 환경을 조성했다. 인간을 성적 대상화하고 구분 짓는 문화, 자의식 과잉, 공감력 결함 등이 약자에 대한 폭력 행동과 범죄 행위에 기여한다는 심리학 연구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정말이지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은 이미 진부하다. 이 진부한 사실을 중립적인 정보로만 기억하고는 어떤 사유도 반성도 행동도 하지 않을 때, 하찮은 악은 ‘김학의 사건’으로, ‘장자연 사건’으로, ‘버닝썬 사건’으로, 또다시 ‘텔레그램 범죄’로 그 외연을 바꾸며 악랄해진다.

그러나 성 착취 범죄가 유구히 반복되는 가운데 분명히 달라진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생물학적 연령이나 불리한 사회 경제적 상태 때문에 합리적인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함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책임을 성찰하고 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않고, 범죄자들의 서사나 자의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을 끝까지 지켜볼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입법기관과 사법기관과 수사당국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결과물과 강력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 사회가 더 이상 악을 관망하는 거대한 n번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n번방#성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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