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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대법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기환송… 직권남용죄 적용 문턱 높여

입력 2020-01-31 03:00업데이트 2020-01-31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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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조윤선 등 사건 재심리 판결… 직권남용혐의 14개중 12개 유죄
‘공무원 의무없는 일 하게 했는지’엔 “직무 벗어난 일인지 다시 따져봐야”
안철상 주심 등 “과잉적용될 경우 공직자 창의-개혁적 의견 위축시켜
국가 발전 가로막는 결과 올수 있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30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를 하기에 앞서 법정에 앉아 있다. 대법원은 직권남용 혐의의 기준을 엄격하게 판단하라는 취지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특정 인사를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직권남용죄의 구성요건 중 ‘직권의 남용’에 대해선 기존 판례를 유지했지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는 일반 사인(私人)과 공무원을 구분해 판단해야 한다는 새 법리를 내놓았다.

현 정부 들어 진행된 적폐청산 수사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다는 비판이 제기됐던 직권남용죄 적용에 대해 대법원이 엄격한 해석을 내놓은 것이어서 진행 중인 다른 직권남용 사건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정해 놓았다.

○ ‘의무에 없는 일’에 대한 엄격한 해석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30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81)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54) 등에 대한 상고심 선고에서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 대법원장 등 11명의 다수의견은 김 전 실장 등이 문체부 공무원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들에게 지원 대상에서 특정 인사를 배제하라고 지시한 것은 직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게 한 것은 형법 제123조에서 정한 ‘직권의 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 전 실장에게 적용된 14개의 직권남용 혐의 중 12개에 대해선 원심과 같이 유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김 전 실장 등이 직권을 남용한 것과는 별개로 김 전 실장의 지시를 받은 문체부 공무원들이 ‘지원 배제’ 업무와 관련해 실행에 옮긴 모든 일들이 원래 담당 공무원의 의무에 없었던 일인지는 하나하나 따로 따져봐야 한다며 나머지 직권남용 혐의 2개는 파기환송했다. 문체부 공무원이 각종 명단을 송부하고, 지원 대상 공모사업 진행 중 심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한 것까지 법령에서 정한 직무의 범위를 벗어나는 ‘의무에 없는 일’인지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직권남용 행위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이 공무원이거나 공공기관 임직원인 경우에는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일을 한 것이 의무에 없는 일인지는 관계 법령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서로 간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게 통상적”이라며 “이런 관계에서 한쪽이 상대방의 요청을 듣고 협조하는 등의 행위를 ‘의무에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 “직권남용 과잉 적용, 국가 발전 가로막아”

대법원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대한 해석을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직권남용죄가 남용되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주심인 안철상 대법관 등도 보충의견을 통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과잉 적용될 경우 직권남용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해 창의적·개혁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위축시키게 돼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공직자에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해, 관련 규정을 충실히 따른 행위에 대해선 책임을 지지 않는 공직사회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의무에 없는 일’에 대한 해석과 달리 대법원이 ‘직권의 남용’에 대해선 구체적인 판단을 내놓지 않아 모호성은 남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호재 hoho@donga.com·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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