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덜 나면 이긴다는 이상한 경쟁[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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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형 대일 무역적자 감소도 승리일까
정치과잉 뒤 누적된 손실은 누구 몫인가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지난주 여당 핵심 의원이 라디오에서 한 말이다. “한일 간 경제 전쟁에서 우리가 더 손해를 봤느냐, 일본이 더 손해를 봤느냐.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 폭이 현격히 줄었다. 그러니까 일본의 손해가 훨씬 더 많다.” 이상하지 않은가. 경쟁의 기준이 이익이 아닌 손실의 규모이고, 그 경기장에서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발언은 올해 대일 무역적자가 16년 만에 최저치로 줄어들 것이라는 통계 전망을 계기로 나왔다. 적자 폭 감소가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맥주 등 소비재 수입이 감소한 때문만이라면 그나마 감정적 동의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허리인 반도체 업계 불황으로 일본산 장비 수입이 줄어든 요인이 컸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중 식음료는 전체의 1%에 불과하지만 반도체 장비 등 기계류는 30% 안팎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건 교역 축소의 후과다. 올 들어 10월까지 일본으로 내보낸 수출은 6.5%, 수입은 12.8% 줄었다. 금액 기준으로 수출에서 1조9000억 원가량이 사라졌다. 가뜩이나 수출 감소로 경제 전반이 위축되고 있는데 지금 같은 마이너스 경쟁에서 우리가 덜 상처를 입었다며 뿌듯해할 일인지 이해가 안 된다.

독과점시장에서의 경쟁이라면 상대의 손실을 키워 궤멸적 타격을 주는 전략이 더러 효과적일 때가 있다. 냉전 때 미소 간 군비 경쟁이 소련 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듯 말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글로벌 시장의 수많은 플레이어 중 하나일 뿐이다. 일본으로 가는 한국인 관광객이 전년 대비 60% 가까이 줄어든 9월, 우리는 일본의 몇몇 지방도시가 관광 수입 감소로 고전하고 있다는 보도에 내심 흐뭇해했다. 하지만 같은 달 일본과 한국인 관광객이 19% 늘어난 대만은 두둑해진 여행수지 흑자를 즐기며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 비율은 10월 들어 두 자릿수로 줄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출규제를 들고나왔다. 한국이 일본의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건 정치적 사안을 국가 간 교역의 영역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경제적 관점에선 끝까지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싸움을 하면서도 자기 것을 지키는 영리한 태도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산업),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혼자 다 해야 한다는 갈라파고스적 논리로 귀결돼선 안 된다. 그동안에도 소부장은 항상 취약한 고리였지만 한국 반도체산업은 세계 1위에 올라 있다. 1965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 한 번도 대일흑자를 못 냈지만 한국의 전체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세계 6위(작년 기준)이고 일본은 적자다. 우리는 국가 간 분업 구조를 매우 잘 이용해 왔던 나라다.

한일 간 정치 지형에서 반일(反日)의 경제학은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손쉬운 선택이다. 하지만 뒷감당은 국민과 기업 몫이다. 22일 오전까지만 해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반드시 종료해야 한다고 했던 여당은 그날 저녁 청와대가 ‘조건부 연장’을 발표하자 외교적 승리라며 바로 입장을 바꿨다.

미래의 어느 날 정치의 과잉이 빠져나간 한일 간 경제 현실에서 ‘일본보다 덜 손해를 본’ 우리의 승리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글로벌 반도체 경기가 다시 살아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에서 반도체 장비를 들여와야 하고 거기서 만든 반도체를 일본에 팔아야 한다. 다시는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도 극일이지만 일본을 더 잘 이용하는 것도 극일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지소미아#대일 무역적자#한일 경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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