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수부터 옹성우까지…스타들은 왜 오디오북 낭독에 빠졌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일 1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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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일요일 늦은 밤, 라디오 스피커 너머로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박완서 작가의 ‘그 남자네 집’의 한 구절이 배우 이엘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책 낭독 프로그램인 MBC 라디오 ‘책을 듣다’를 통해서다. ‘책을 듣다’는 지난달 5일부터 토, 일요일 오후 9시 25분 연예인들의 목소리를 빌려 30분간 책을 읽어준다. 가수 배철수(노인과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정승환(끌림·이병률), 유승우(고슴도치의 소원·톤 텔레헨), 배우 이연희(밑줄 긋는 남자·카롤린 봉그랑), 이엘(그 남자네 집·박완서)이 10월 방송에 참여했다. 11월 방송에서는 배우 정은채와 황보라, 그룹 워너원 출신 옹성우, 옥상달빛, 아나운서 정지영과 박혜진이 나선다.

●상상력 키우고 감정 전달하고

연예인들이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MBC ‘책을 듣다’와 일요일 자정부터 2시간 동안 아이돌이 문학책을 읽어 내려가는 EBS 라디오 ‘아이돌이 만난 문학’ 같은 방송 프로그램과 네이버 오디오클립의 ‘셀럽 오디오북’, 전자책 구독서비스 업체인 밀리의 서재 ‘리딩북 서비스’ 등을 통해서다.

낭독에 참여한 연예인도 화려하다. 배우 최민식, 이병헌, 정해인, 강하늘, 변요한, 이제훈, 정상훈, 한지민, 유인나, 이연희, 이엘, 박은혜, 이상윤, 백진희를 비롯해 가수 배철수, AOA설현, 장기하, 장재인, 워너원 하성운과 옹성우, 정승환, 폴킴, 청하, 요조 등이 나섰다.

연예인들이 ‘듣는 책’ 오디오북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네이버 오디오클립 셀럽 오디오북을 통해 ‘오 헨리 단편선’ 7권을 완독한 정해인은 오디오북의 매력으로 ‘상상력’을 꼽았다. 정해인은 지난달 31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눈으로 보던 책을 들을 수 있다는 점과 눈을 감고 들으면 자연스럽게 내용을 상상하게 되는 점이 매력적이다. 제 목소리를 통해 (청취자에게) 이런 장점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에 끌렸다”고 말했다.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같이 펀딩’에서 유인나와 함께 오디오북 프로젝트에 나선 강하늘 역시 시각적 요소를 배제하고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감정이 녹아든 낭독자의 목소리만으로 책의 내용을 전달한다는 건 눈으로 읽는 묵독과는 또 다른 매력이라는 이야기를 유인나 선배와 한 적이 있어요. 특히 청각 장애우분들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왔고요.”(강하늘)

세 아이의 아빠인 정상훈은 밀리의 서재에서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나이토 요시히토), ‘디즈니의 악당들 2: 저주받은 야수’(세레나 발렌티노)를 낭독했다. 그는 일상에서 오디오북을 즐긴다고 했다.

“오디오북을 라디오 듣듯이 자주 들어요. 특히 많은 정보를 원하는 세 아이들과 함께 듣곤 하죠. 아빠의 마음으로 직접 오디오북 낭독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정상훈)

실제 오디오북 시장에서는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같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동북이 상당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책에서 위안 얻고 지적 이미지 더해져

‘책을 듣다’에서 이엘은 책 선정과정에도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김나형 PD는 “이엘 씨는 책에 대한 분명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며 “낭독자가 직접 책을 고른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엘 씨는 제작진이 제시한 리스트 가운데 박완서 작가의 ‘그 남자의 집’을 읽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설현 씨는 녹음 전에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다 읽고 왔더라고요.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낭독한 정은채 씨는 ‘책을 읽고 집중해서 녹음한 시간이 내게도 큰 위안이 됐다’고 전했고요. 옹성우 씨는 녹음 당일 ‘글에 담긴 감정을 잘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하더니 막상 녹음할 땐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냈어요.”(김나형 PD)

오디오북 시장 확대를 위해 ‘연예인’ 카드를 들고 나선 업체의 전략도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오디오클립과 독서 애플리케이션 밀리의 서재가 연예인 리더(reader)를 통해 오디오북 시장을 리드(lead)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3년 3월 론칭한 밀리의 서재는 2018년 7월 리딩북(오디오북) 서비스를 선보였다. 책 내용을 30분 정도로 담은 요약본을 연예인이 낭독한다. 이병헌이 첫 주자로 나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다. 일주일 만에 1만 5000명이 들으며 반응이 뜨거웠다. 전송이 밀리의 서재 매니저는 “친숙한 연예인의 목소리는 콘텐츠에 대한 흥미와 몰입을 높인다”며 “연예인들 역시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고 책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높은 호응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책을 통해 지적인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것도 강점으로 꼽힌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요약본이 아닌 완독 버전이다. 한지민이 완독한 ‘법률스님의 행복’은 지난달 31일 기준 24만 6073회 재생됐다. 정해인이 낭독한 ‘오 헨리 단편선’은 19만 3852회, 갓세븐(GOT7) 진영이 읽은 ‘어린왕자’는 12만 6284회, EXID 하니가 낭독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은 10만 6942회, 이보영이 읽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10만 2146회 재생됐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홍보담당자인 손서희 대리는 연예인을 활용한 오디오북에 투자하는 이유로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 비해 걸음마 단계인 국내 오디오북 시장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손 대리는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1020세대의 독서를 장려하는 효과도 함께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EBS 라디오 ‘아이돌이 만난 문학’ 역시 청소년의 절반가량이 책을 아예 안 읽거나 한달에 한 권 이하를 읽는 현실을 반영해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웠다. 실제 팬덤을 확보한 아이돌이 읽은 오디오북과 원작은 팬들 사이에서 굿즈(Goods)로 통한다. ‘아이돌이 만난 문학’을 연출하는 강동걸 PD는 “아이돌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고 싶었다”며 “워너원 출신의 하성운 씨가 ‘라면은 멋있다’를 낭독한 후 온라인 및 오프라인 서점에서 해당 종이책이 청소년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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