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잃어버린 여름’[현장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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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시절인 2016년 개관한 미 국립 흑인역사문화박물관. AP 뉴시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시절인 2016년 개관한 미 국립 흑인역사문화박물관. AP 뉴시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워싱턴 모뉴먼트(기념탑)가 우뚝 서 있는 ‘내셔널 몰’의 한가운데에는 금빛과 초콜릿 빛이 뒤섞인 듯한 강렬한 색깔의 건물이 하나 있다. 사각형 모양을 3단으로 겹쳐 쌓아 올린 독특한 외관이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이라는 곳으로,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임기 막바지였던 2016년 9월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에선 흑인 노예의 처참했던 생활과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등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던 흑인들이 세계 최강대국의 건국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강조한다. 미국의 최대 치부로 꼽히는 인종 갈등에 대한 성찰, 국민 통합을 위해 사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또한 박물관이 내세우는 가치이다.

이곳에 짙게 드리운 전임자의 흔적 때문일까. 2017년 1월 당선자 신분으로 이곳을 찾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뒷얘기가 뒤늦게 알려지면서 구설을 낳고 있다. 1일(현지 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 당선자는 흑인의 역사와 상관없는 딴소리를 계속했다. 노예무역에 관한 전시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수행팀은 방문에 앞서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그는(트럼프 당선자는) 불편한 것(difficult)을 보기 원하지 않는다”는 ‘당부’를 하기도 했다. 안내를 맡았던 로니 번치 전 스미스소니언협회 소장은 “인류 역사의 주요 범죄인 노예무역에 대한 그의 반응에 매우 실망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선자의 이해와 관점을 넓힐 기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요즘 미중 무역전쟁 후폭풍, 인종주의 논란, 총기 참사, 잇따른 말실수와 거짓 발언 논란으로 힘겨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WP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현직 대통령의 입지를 강화해야 할 시점에 트럼프 대통령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양극화했다”고 비판하며 ‘잃어버린 여름’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특히 연이은 총기 참사는 내년 재선을 노리는 그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 대통령 본인의 거듭된 인종주의적 발언이 증오 범죄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총기 규제 시스템의 문제보다는 “정신이상자의 문제”라며 개인의 일탈에 방점을 찍어 본질을 외면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이를 거슬러가며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법을 따져 물어야 하는 것도 인간이다. 하물며 사인(私人)도 그렇거니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최고 권력자는 더욱 그렇다. 껄끄럽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진정한 지도자가 아닐까.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그렇지 못한 지도자로 인해 생기는 어지러운 일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트럼프#미국 대선#총기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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