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영웅 기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美 외교의 힘[광화문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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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미국 외교관들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물론이고 존 설리번 부장관,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브라이언 훅 이란특별대표 등 고위 당국자들의 얼굴도 보였다. 미 국무부 청사 1층 대강당이 꽉 찼다. 지난달 말 국무부 창립 230주년 기념행사가 진행되는 자리였다.

무대 중앙의 대형 스크린을 장식한 행사 슬로건은 ‘하나의 미래를 향해, 하나의 미션을 위한, 하나의 팀(One Team, One Mission, One Future)’. 행사는 전직 국무장관들의 축하 동영상 상영으로 시작됐다.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전 장관은 여전히 정정했고, 크림색 카디건 차림의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은 우아해 보였다. 국무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원들을 격려하는 이들의 메시지는 따뜻했다.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의 등장은 국무부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순서였다. 올해 96세 노장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를 폼페이오 장관이 부축했다. 전 직원이 그를 기립박수로 맞이했다. 이제는 느리고 어눌해진 그의 말투 때문에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와의 대담을 알아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후배 외교관들은 수시로 박장대소하고 박수를 쳤다.

정작 이런 외교 거물들보다도 인상을 끈 것은 폼페이오 장관의 축사였다. 그는 “우리 역사를 잠시 함께 돌아보고 싶다”며 이름도 생소한 실무급 외교관들의 활약을 소개했다.

1814년 영국이 워싱턴을 침략했을 때 스티븐 플레즌턴이라는 서기는 국무부에 보관돼 있던 주요 국가 문서들을 교외의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룩셈부르크에서 근무하던 조지 월러는 위협이 고조되는 시점에도 사무실을 지키며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유대인이 미국 비자를 받아 유럽을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런 ‘외교의 영웅’들이 자유를 수호하며 우리 업무의 진정한 모범 사례를 만들어 미국 외교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숨겨진 외교 영웅’의 사례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주프랑스 대사였던 남편을 도와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키티 헤릭 여사 등 외교관 가족들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 차례다. 뒤를 이을 후배들을 위해 우리가 길을 닦아야 할 때”라며 “우리가 그들의 빛나는 모범 사례가 되자”고 역설했다.

국무부 직원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해외에 파견된 미국 외교관 1만3000명 모두가 이 축사를 접할 때만큼은 비장해졌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외교는 세계 곳곳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중국과의 전방위적 충돌, 중동지역의 군사적 긴장감,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일방적 정책과 다른 나라들의 반발로 외교무대에서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적 리더십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현장을 지키는 외교관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긴장을 낮추고 국익을 증진하며 자국민을 보호하는 이런 ‘숨은 영웅’들이야말로 외교의 근본을 지킴으로써 그 가치를 빛나게 만든 힘이다. ‘민주적 가치와 함께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세상을 증진시킨다’는 국무부의 비전에 새삼 눈길이 가는 하루였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미국 외교#폼페이오#헨리 키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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