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회 종소리 울리자… 촉석루 등 5곳서 동시다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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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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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4화> 경남 진주

진주 시위 당시 기생독립단과 걸인독립단이 맹활약했다. 사진은 기생들과 걸인들의 만세시위를 재현한 모습이다. 진주문화사랑모임 제공
진주 시위 당시 기생독립단과 걸인독립단이 맹활약했다. 사진은 기생들과 걸인들의 만세시위를 재현한 모습이다. 진주문화사랑모임 제공
‘반만 해를 맥맥이 이어 슬기로 다듬고 죽음으로 지켜온 내 조국, 왜구 너희 간계에 잠시 더럽혔나니… 삼월 열여드레 장날 스물두 어른 앞장서 횃불 밝혀 높이 들었으니 임진대첩의 민족혼은 진양성루에 또다시 메아리쳤고 순국선열의 충절은 다시 강물을 노하게 했도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진주성 언덕에 세워진 ‘3·1독립운동 기념비’의 비문 일부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1592년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게 바닷길이 막히자 호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략했다. 2만 병력을 투입했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 3800여 명에게 패했다. 이른바 1차 진주성 전투였다. 이듬해 병력을 9만3000명으로 대폭 늘려 시작된 2차 전투로 결국 진주성은 함락됐다. 하지만 이후 진주성은 항일의 상징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독립만세 함성이 전국을 휩쓸었던 1919년 진주에서도 만세시위의 함성은 뜨거웠다. 320여 년 전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진주성을 중심으로 반일 시위가 펼쳐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일제 감시 피해 비밀회합

고종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인사들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 뒤 진주로 돌아오면서 진주지역의 저항 움직임은 본격화됐다. 당시 서울을 찾았던 김재화 심두섭 조응래 박대업 등은 경찰 검문을 피해 기차를 타거나 도보로 이동하면서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진주로 몰래 반입했다.

시위 주동자들은 집현면 하촌리에 위치한 김재화의 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비밀회합을 갖고 거사 계획을 꾸몄다. 이들은 서울에서 본 것과 같은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만 장과 태극기 수천 장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격문은 제목을 ‘교유문(敎喩文)’으로 바꿨다. 1919년 6월 일제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교유문에서 ‘우리 민족은 미국 대통령이 외친 민족자결의 소리에 따라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와 같은 소리로 상응하고 이미 잃은 국권을 회복하고 이미 망한 민족을 구하여 복수를 해야 한다’며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3월 10일경부터 ‘삼남지방에서는 왜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격문이 진주 거리에 나붙기 시작했다. 당시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일제는 경계령을 선포하고 각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일본인 교사들에게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했고, 여비를 줘가며 다른 지방 출신 유학생들을 강제로 귀향시키는 조치까지 취했다.(이용락 ‘삼일운동실록’)


○ 진주성에 3만 집결


‘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진주 장날인 3월 18일 정오가 되자 진주교회의 종각에서 우렁찬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중앙시장, 촉석루 입구, 재판소 앞, 봉곡동, 칠암동 강변 등 5곳에서 만세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연설이 끝나자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을 향해 시가행진을 벌였다. 허를 찔린 일제 경찰이 시위 행렬을 가로막고 주동자 체포를 시도하면서 곳곳에서 난투극과 육박전이 펼쳐졌다. 일제는 소방차로 더러운 개울물을 퍼붓고 곤봉으로 난타하기도 했지만 시위 행렬은 흩어지지 않았다.

시위대는 진주성 안으로 진입한 뒤 영남포정사 문루 앞에 집결했다. 이 문루는 원래 진주관찰부의 관문이었으나 일제가 진주성 안에 경남도청을 지으면서 도청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시위대 규모가 3만 명에 이르렀다.(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일제는 시위 군중이 너무 많아 즉각 해산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주동자로 보이는 이들의 흰옷에 붉고 푸른 물감을 뿌려 표시하기 시작했다. 해가 진 뒤 300여 명이 체포됐지만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봉화가 켜지고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오후 7시에는 ‘노동독립단’이 나타나 만세 행진을 시작했고, 오후 9시 무렵에는 ‘걸인독립단’이 밥그릇을 두드리며 나타나 시위를 벌였다. 걸인독립단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것도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때문이며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000만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라고 외쳤다.(‘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

일제 군경을 놀라게 한 진주 장날 3만 시위의 시작을 알린 것은 교회 종소리였다. 이 종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으나 2012년 종탑과 함께 복원됐다. 진주=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일제 군경을 놀라게 한 진주 장날 3만 시위의 시작을 알린 것은 교회 종소리였다. 이 종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으나 2012년 종탑과 함께 복원됐다. 진주=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일부 기록에는 교회에 매달아 놓은 종이 밤사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시위대가 비봉산 위에 올라가 나팔을 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종소리가 아니라 나팔소리가 신호였다는 주장이다. 추경화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1970년대에 그런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고등경찰관계적록 같은 일제 자료에 교회 종이 시위 시작을 알리는 신호 역할을 했다고 나와 있고 관련 증언들도 있다”며 “종이 맞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17일 찾아간 진주교회 앞에는 100년 전 시위 시작을 알렸던 종과 종탑이 복원돼 있었다. 2012년 종탑 복원에 맞춰 제작된 ‘3·1운동 기념 종탑’이라는 제목의 동판에는 ‘1919년 3월 18일 진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5곳에서 만세 의거가 일제히 시작됐으며 당일 일제에 의해 종이 철거됐다’고 소개돼 있다.

○ 기생독립단의 활약

일제를 혼란과 두려움에 빠뜨린 시위의 열기는 이튿날에도 식을 줄 몰랐다. 3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7000여 명이 진주성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날 시위에는 상인들도 일제히 가게 문을 닫고 동참했다. 기독교계 광림학교 악대가 선두에 서서 행진을 시작하자 진주성이 떠나가도록 우렁찬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시위대가 도청과 경무부에 접근하자 일제 군경은 총칼을 휘두르며 무력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돌팔매질로 저항했지만 부상자들이 속출하면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 시위에서 기생들이 앞장섰다고 제목을 붙인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 진주문화사랑모임 제공
진주 시위에서 기생들이 앞장섰다고 제목을 붙인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 진주문화사랑모임 제공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 1만여 명이 다시 집결해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군의 여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등장했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으로 구성된 ‘기생독립단’이었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변을 돌며 진주성 내 촉석루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세워진 촉석루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자축연을 벌였던 곳이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국했던 의암(義巖)은 촉석루 바로 아래에 있다. 촉석루 옆에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도 있다.

기생독립단이 촉석루와 의암을 목적지로 정한 것은 의기(義妓) 논개의 기백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 등에 따르면 일제 경찰 수십 명이 나타나 긴 칼을 뽑아들고 위협을 가했지만 이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한 기생이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 칼에 맞아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겠다”고 소리치자 경찰이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기생 6명이 체포됐다. 체포된 한 기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썼다고 전해진다.

진주 기생들의 항일 의식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안’이라는 제목의 3월 25일자 기사에서 ‘진주는 지금도 진정이 안 되고 자꾸 소요가 일어날 형세가 있다. 19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한국 국기(태극기를 지칭)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 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주모자 6명의 검속으로 해산됐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라고 소개했다.

기생독립단이 맹활약한 3월 19일 시위는 오후 11시까지 계속됐다. 100여 명이 체포됐는데 대부분 학생이었다. 3월 20일에도 수천 명이 악대를 앞세우고 진주경찰서로 몰려갔다. 4월 22일에는 체포된 애국지사들을 형무소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3000여 명이 모여들자 일제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해 1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진주 지역에선 5월까지 만세시위가 모두 20여 회 발생했다.(‘진주시사’)

진주=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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