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 다른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 아지트’ , 낙원상가의 매력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3일 15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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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놀 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종로2가 사거리에서 고민을 시작한다. 대체로 청계천 방면으로 걸어서 종로 ‘젊음의 거리’로 가든지, 아니면 안국역 방향 길로 걷다가 인사동 골목으로 진입한다. 그 반대편인 종로 낙원동 아구찜 골목이나 익선동 골목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인사동과 낙원동을 가로지르는 삼일대로 위에 들어선 건물이 낙원악기상가다. 1969년에 완공돼 올해로 50년을 맞는 건물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악기 전문 상가다. 건물의 계단과 벽 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는 겉모습만 보면 딱히 뭐 볼 게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겉’과 다르게 낙원악기상가는 알차게 ‘속’을 채워왔다. 꽤 괜찮은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입소문도 퍼졌다. 건축, 문화 분야 전문가들은 복고와 새로운 트렌드가 공존하는 ‘뉴트로(Newtro) 1번지’로 꼽는다. 건물 1층에 새겨진 ‘낙원¤딩’이라는 글자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 겉과 속 다른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 ‘아지트’… 들어갈 땐 경계, 나올 땐 무장 해제

서울문화재단에서 발행한 ‘서울건축읽기’에서 조한 홍익대 교수(건축학)가 서술한 내용을 보면 낙원악기상가가 현재 어떤 구조이며, 어떻게 콘셉트로 변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지하에는 구수한 청국장과 시원한 잔치국수를 먹을 수 있는 재래시장이 있고, 지상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사거리가 있고, 2, 3층에는 온갖 빛깔의 악기들이 교향악단처럼 늘어선 악기 매장이 있는가 하면, 4층에는 예술 영화와 뮤지컬을 볼 수 있는 전용관이 3개나 있고, 9층부터는 빛이 가득한 중정을 품고 있는 아파트가 있다. 최신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 광고가 아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에스컬레이터도 없네’라고 의심을 하며 계단을 따라 상가 2층에 올라가니 남은 경계심마저 바로 무장해제된다. 길거리에서 2층 상가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 출입구만 8군데. 기본적으로 오는 사람들을 문전박대하는 곳은 아닌 셈이다. 2층 중앙에는 새로 카페도 생겼다. 따로 음악을 틀 필요도 없다. 매장에서 나오는 악기 소리,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 소리가 섞여 묘하게 귀를 파고든다.

층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악기 매장마다 ‘고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상인들은 저마다 악기 상태를 살피고 직접 연주를 해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다 손님이 매장에 들어와 악기를 찾으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3층의 타악기, 관현악기 등 전문 매장을 포함해 약 300개 매장에서 3만여 종의 악기를 취급한다. 외국인들이 놀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 아지트다. 30년 이상 이곳에서 매장을 운영 중인 상인도 33%에 이른다. 기족이 2대째 이어받은 매장도 20%가 넘는다. 전체 상인의 85% 이상이 10년 이상 매장을 운영해오고 있다.

한 매장을 지나치다 농반진반으로 “기타 가격이 비싸 보인다”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우리 입장에서는 손님에게 값을 부풀려 팔 이유가 없다”며 “오히려 손님이 정확한 악기의 스토리와 기능을 알고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구입해 음악의 재미를 알아갔으면 하는 목표가 있다”는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상점마다 스토리가 있고 상인마다 철학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낙원악기상가만의 경쟁력이 됐다. ‘신광악기’에서 웬 노신사가 플루트를 만지작거렸다.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지병옥 대표는 국내 최초의 플루트 수리 전문가다. 종로 악기상에서 금관악기를 수리하는 종업원으로 일하다 1974년 낙원악기상가에 터를 잡았다. 오로지 독학으로 플루트의 모든 것을 체득했다. 현재는 둘째 며느리가 가업을 잇기 위해 매장에서 기술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 현악기가 가득한 ‘한양악기’. 기자가 태어난 1976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하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최신해 대표는 영국에서 악기 수리와 제작 공부를 하고 음대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한 이버지에 이어 2006년부터 매장을 운영해온 2세대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초등생 딸이 앞으로 아빠의 뒤를 잇겠다고 해 자부심이 남다르다. 최 대표는 “낙원상가가 세련된 건 아니지만 세월과 시간이 보증하는 명성과 신뢰가 있는 곳이다. 이 공간이 한국 음악, 나아가 문화에서 대표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 악기 사랑 고객들에게 환원… 음악 진입 장벽 낮춘 ‘플레이 낙원’으로

단순히 악기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상인들은 악기에 얽힌 스토리를 팔고 고객과 연결 고리를 유지하면서 낙원악기상가가 ‘음악의 고향’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악기를 자주 접하고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낮춰왔다.

악기를 통해 음악을 평생 친구로 만들자는 ‘반려 악기’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상인들은 2016년부터 ‘낙원의 고수’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객들에게 악기 만들기와 악기 이론 강습을 해오고 있다. 악기 수리 등 소외 계층을 위한 재능 기부와 후원도 하고 있다.

바쁘고 지친 직장인 등에게 기타와 우쿨렐레, 보컬 강습을 지원하는 ‘미생 응원 이벤트’,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반려 악기를 만들어볼 수 있는 ‘나만의 우쿨렐레 만들기’ 프로그램 등을 진행 중이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수강자는 180명. 상가 4층에는 고객들이 주말과 야간에 쓸 수 있는 녹음실과 합주실을 마련했다. 예약을 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최신 장비가 갖춰진 합주실에서 50대 중년들이 호흡을 맞춰보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BTS) 노래도 조금 바꿔 작곡해볼 수 있을까?”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어워드 2관왕을 차지한 BTS가 문득 떠올랐다. 3층 ‘퓨처미디어’ 매장에 가니 여러 악기 기능을 결합한 마스터키보드가 눈에 띄었다. 음악 전문 프로듀서들이 주로 쓰는 악기다. 이 매장 이은택 대표는 지난해부터 고객들에게 작곡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즉석에서 곡을 만들어보는 체험 기회도 주고 있다.

● 고급 쇼핑몰 안 부럽다… 오감 살리는 낭만과 역사가 있다

악기와 음악으로 열린 감성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 2층에서 4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이색 벽화들이 시선을 끈다. 4층 417호 전시장에서는 상시적으로 작가들의 대안 미술전이 열리는데 지난달 13일까지는 우주가 멈춘 뒤 함께 멈춰버린 서울을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이미지 작품들이 소개됐다. 특히 온갖 웹 정보의 부산물, 쓰레기로 죄다 뒤덮인 서울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현재는 ‘독립’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4층 실버영화관 ‘낭만극장’은 50년 역사 낙원악기상가 외관을 떠올리며 추억의 감성을 돋게 한다. 고전 영화부터 개봉작까지 테마별로 상영하는데 55세 이상은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그 옆 야외 공연장에 서 있으면 낙원악기상가 전체 외경을 볼 수 있다.

낙원악기상가에는 한국 건축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1세대’ 주상복합 건물로 지어진 낙원악기상가는 1층을 비워두는 ‘필로티 공법’으로 지어졌다. 2층부터 5층까지는 매장과 창고, 공유 오피스이고 6층부터 15층까지는 낙원아파트다. 여전히 149가구가 거주 중이다. 원래 150채인데 한 가구가 두 채를 터서 쓴다고 한다. 한강에서 채취한 고품질 모래와 자갈로 탄탄하게 시공돼 매년 건물 안전진단에서 B등급 이상을 받고 있다. 층간 소음도 거의 없다는 설명을 듣고 입이 벌어졌다. 5층 공유 오피스에 가면 실제 아파트 벽 단면 조각을 확인할 수 있다. 아파트 옥상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데 ‘낙원 투어’를 신청하면 살짝 올라가볼 수 있다. 도로 위에 지어진 건물이라 일반 건물 루프톱 카페에서 보는 시야와는 차원이 다르다. 정면으로 청와대가 훤히 보인다.

이달 11일과 25일 토요일에는 우쿨렐레 만들기와 상가 투어를 한 번에 체험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특히 25일에는 일반인과 상인들이 직접 악기 판매자로 참여하는 ‘낙원플리마켓’도 함께 열린다.

지하 1층으로 가면 입이 즐거워진다. 여느 재래시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맛집들이 소박하면서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1만 원짜리 한 장이면 잔치국수, 김밥 등으로 배불리 속을 채울 수 있다. 채널A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 식당으로 선정됐던 ‘일미식당’은 청국장과 오징어, 제육볶음이 일품. 점심시간에는 줄이 길게 늘어선다. 삭막한 분위기는 그저 겉모습일 뿐이었다. 낙원악기상가는 내부 현대화 작업과 스토리텔링을 거쳐 자연스럽게 우리 곁의 ‘파라다이스’로 거듭나고 있었다.

▼“낙원상가가 한국 음악 역사에 기여한 가치 계속 이어갔으면…”▼


낙원악기상가 번영회 박주일 사무총장은 장인의 뒤를 이어 27년간 낙원악기상가에서 기타, 우쿨렐레 등을 취급하는 ‘에클레시아’를 운영하고 있다. 낙원악기상가 상인들을 대표하는 번영회 일을 하며 상가 문화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한때는 늘 철거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돌아보면 어떤가.

“서울 내에서 새롭게 상업 지구가 생겨날 때마다 이곳이 없어진다고 지라시(정보지)가 돌더라. 실제 그쪽으로 터전을 옮긴 사람들도 있다. 늘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해 왔지만 낙원악기상가만의 미풍과 소비자들의 사랑 때문에 유지가 됐다. 지금 상가가 다양한 콘텐츠를 내세우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뀐 건 고객들에게 받은 것들을 환원하자는 취지에서다.

―상가에 활기가 돈다.

”50년 역사의 악기상가가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하다. 매장마다 장인(匠人)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고 수십 년 동안 고객과 얼굴을 마주하며 만든 관계도 끈끈하다.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의 고지식함과 진득함에도 미덕이 있다고 본다.“

―앞으로 어떻게 발전했으면 하나.

”손님들이 추억을 되새기고, 악기와 음악을 넘어 지식도 쌓고, 상인들이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정서가 유지되면 좋겠다. 한국 음악 역사에 기여한 가치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 록이나 재즈, 블루스관, 그리고 음악 관련 서적, 음반을 취급하는 곳이 생겼으면 한다. 잘되는 집은 친절하지 않다는 통설이 낙원악기상가에서만큼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고객과 상생하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고객들이 상가 내에서 ‘버스킹’을 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유재영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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