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아픔의 땅 쿠바…거장들이 연주하는 위로의 노래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3월 7일 06시 57분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레르(가운데 선 사람)를 중심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들이 공연하고 있다. 동명 영화의 한 장면인 이 모습에서 쿠바의 전설적 연주자들이 지닌 열정이 드러난다.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레르(가운데 선 사람)를 중심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들이 공연하고 있다. 동명 영화의 한 장면인 이 모습에서 쿠바의 전설적 연주자들이 지닌 열정이 드러난다.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맘보·차차차·룸바·살사 그리고 쏜
쿠바 노예·원주민들의 피로 쓴 음악
전설들의 손을 거쳐 불멸의 노래로


멕시코만의 바다 위로 노인 산티아고는 조각배를 노 저어 나아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9월의 어느 날이었다.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얻지 못한 그는 “코끝에서 꼬리까지 무려 5.5미터”나 되는 길이의 거대한 청새치와 맞닥뜨렸다.

“어쩌면 자신이 이미 죽은 몸이 아닐까” 싶을 만큼 사투 끝에 마침내 고기를 잡아 항구로 돌아오는 길. 처절했던 싸움의 흔적으로 남은 청새치의 피 냄새를 따라 상어 떼가 조각배로 몰려들었다. 청새치는 끝내 앙상한 뼈로만 남았다.

그렇지만 산티아고는 바다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바다를 ‘라 마르(la mar)’라고 불렀다. 스페인어의 여성형 관사를 붙여 늘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와 수많은 어부들에게 바다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었다. 이들은 일용할 양식을 거기에서 얻었다. 때론 거친 파도로 몰아쳐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앗아가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이들은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이며 “바다를 ‘엘 마르(el mar)’라는 남성형으로 부르”며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로 바라보는 “젊은 어부들”과 달랐다. 그래서 바다는 이들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농부들의 대지가 그러하듯, 위대한 공간이 된다.(이상 “” 부분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1952년작 ‘노인과 바다’(민음사)에서 인용)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 처절한 사투 속 위로의 노래

그 즈음 아르헨티나의 청년 에르네스트 게바라는 ‘어머니의 대지’의 위대함을 찾아 길을 나섰다. 훗날 체 게바라로 불릴 24세의 이 의대생은 “라틴아메리카인으로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 떠나자. 대륙 발견 이전 시대의 문명을 발견해 보고, 마추픽추를 기어올라 그 비밀을 손수 풀어보자”며 여섯 살 위의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500cc 중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힘’이라는 뜻의 ‘포데로사2’라는 이름을 붙여 조국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에서 출발해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칠레 해안을 따라 아마존에 이르는 대륙 횡단에 나섰다.

길 위에서 나환자와 가난한 농부와 광부들을 만났다. “빈곤과 기아, 질병을 목격”했다. “속수무책으로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일이 우리 아메리카 기층민중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현실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의학상의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 새로운 다짐을 했다.

혁명이었다. 길고 긴 식민의 억압을 물리치고서도 여전히 가난과 질병, 독재정치의 철권통치 등에 시달려야 했던 대륙의 수많은 이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39년의 짧은 삶 내내 천식을 달고 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도 여겼다.

1956년 11월부터 2년여에 걸친 험난한 싸움에 나섰다. 쿠바가 첫 번째 근거지였다. 그 속에서 청년은 동료들과 함께 ‘관타나메라’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노래는 생사의 기로 앞에 놓인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청년은 대륙을 횡단하면서 가난한 이들과도 함께 맘보와 탱고를 노래했다. “마치 적 주위에서 춤을 추듯 적을 포위한다”는 의미로 자신이 벌이는 게릴라전에 ‘미뉴에트’라는 별칭을 붙인 그였다.

그는 “쿠바인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아프리카의 고대문화로부터 유래했”고, “쿠바의 음악 역시 아프리카로부터 왔”으며 “아프리카인들은 쿠바로부터 건너온 리듬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그 음악은 다시 아프리카로 되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 모든 지위를 버리고 또 다른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며 아프리카 콩고로 향하기 전이었다.(이상 “” 부분은 평전 ‘체 게바라’에서 인용)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 정열과 열정의 말레콘이 보고 싶다

어떤 이들은 헤밍웨이가 1940년대 후반부터 1961년까지 쿠바에 머물던 시절 낚시 친구로 지낸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를 노인 산티아고의 모델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가 아프리카 서쪽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출신 이민자라는 시각이다. 산티아고가 “섬들의 하얀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과 “카나리아 군도의 여러 항구와 정박지”가 나타나는 꿈을 꾼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명이 따라 붙는다.(‘노인과 바다’ 번역자 김욱동 한국외대 교수의 ‘작품 해설’ 중)

이런 시각에 더해 체의 말처럼 쿠바의 문화가 아프리카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쿠바도 15세기 이후 무려 400여년 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쿠바를 떠나기까지 스페인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끌고 왔다. 금을 캐고 사탕수수를 수확해야 하는 노동력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노래와 음악은 노예와 원주민들의 피가 섞여 세상에 나왔다. 맘보와 차차차, 룸바와 살사 그리고 쏜 등 쿠바인들의 음악은 그렇게 아픔의 역사를 품고 있다. 기타와 피아노, 트럼펫, 베이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다양한 타악기가 어우러져 특유의 리듬으로 듣는 이의 귀를 간질이는 흥겨운 듯, 슬픈 듯 흐르는 특유의 멜로디가 그렇게 씌었다.

혁명 이후 음악은 한때 단절되는 듯했다. 숱한 연주자들이 무대를 잃었고, 구두닦이나 이발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레르 같은 이들이 그랬다. 이브라힘은 영원히 무대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음악을 떠나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었다. 마침내 이브라힘 페레르는 기타리스트 콤파이 세군도,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 보컬리스트 오마라 포르투온도 등 전설의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 다시 나섰다.

1998년 4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극장에서 이들은 ‘찬찬(Chan Chan)’을 시작으로 공연을 펼쳤다. 카리브해의 따가운 태양을 피해 스며들어 정열적인 춤으로 한 시절을 보냈던 과거 클럽 ‘부에나 비스트 소셜’의 이름을 딴 무대였다. 산티아고처럼 “두 눈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던 이들은 무대 위에서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 또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어깨에는 아직도 이상하리만큼 힘이 흘러넘쳤다. 목에도 여전히 힘이 있었고 고개를 앞쪽으로 떨어뜨리고 잠을 자고 있을 때면 주름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노인과 바다’)

젊었던 시절과 다르지 않은 여전한 힘과 경쾌한 몸놀림으로 이들은 노래했다. 그리고 이들의 연주와 노래는 끝없이 이어진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말레콘을 바라보며 체 게바라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참고 견뎌 낼 수 있는지 보여줘야겠어”라는 노인 산티아고의 의지를 되새기지 않았을까. 결코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두 사람처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 전설적 연주자들 역시 꺼지지 않을, 여전히 젊은 음악적 열정으로 태양에 맞서려 했던 건 아닐까.

오늘, 이들의 열정이 고스란할 아바나가 보고 싶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 사진제공|백두대간·오드

■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 음악의 전설적 연주자들의 이야기.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등을 연출한 독일의 명장 빔 벤더스 감독의 1999년 작품. 미국 기타리스트 겸 음악프로듀서 라이 쿠더가 연주자들을 찾아 나선 뒤 다시 무대에 세우기까지 과정, 이들이 음반을 녹음하는 모습 등을 담았다. 지난 시간을 돌이키며 회한과 기쁨을 교차시키는 노령의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깊고 큰 울림을 안겨준다. 이들은 1920∼30년대 쿠바 음악을 꽃피운 아바나의 유명 클럽에서 이름을 따와 음반을 새롭게 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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