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명건]분노에 휘둘리는 한국당과 조국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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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이명건 사회부장
“요즘 이견이 곧 심각한 불신으로 치닫는 경우가 너무 잦다. 자신의 소신을 갈고닦기보다 다른 사람을 단죄하려고 애쓰는 데 더 몰두한다.”

딱 한국 상황이다. 특히 최근 청와대 특별감찰반을 둘러싼 정치권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은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의 지난주 정계 은퇴 고별 연설 일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분열 정치’를 비판한 것이다. 라이언 의장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기술과 화를 돋우는 알고리즘 때문에 분열이 증폭되고 있다”며 “분노가 브랜드가 됐다”고 했다.

올해 1년 ‘분노 브랜드’가 한국도 휩쓸었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특감반에서 김태우 검찰 수사관이 작성했다는 보고 목록 104건을 자유한국당이 전면 공개한 것은 그 소산이다. 목록은 모두 수사기관 등의 객관적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사실일 가능성의 영역에 있을 뿐이다. 일부는 지라시에 가깝다. 그래서 첩보고 동향이다. 한국당은 목록 공개 전 사실관계를 확인할 시도는 해봤는지 모르겠다. 각 목록의 비위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하나가 다 명예훼손이다. 목록 중 비위 의혹 당사자로 지목된 일부 인사의 이름을 가리긴 했다. 하지만 해당 기관이나 부처 안팎에선 그 인사가 누군지 뻔히 안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MB 정부에서 모 대기업이 8000억 원 특혜를 제공받았다는 의혹 목록의 경우 해당 기업 이름을 그대로 드러냈다. 재계 관계자는 “이런 식으로 기업이 매도되면 정치권에 공개적으로 대항할 수 없다.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라서다. 분해서 온몸이 벌벌 떨린다”고 말했다.

한국당은 불법 사찰 의혹을 폭로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할 것인가. 대의를 위해 개인과 기업의 명예는 외면해도 괜찮나. 어쨌든 일부 목록이라도 사실이 아닐 경우 면책특권을 악용했다는 비난을 피할 순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로 몰린 분노에 휘둘린 게 아니라면, 율사 출신 의원이 16명이나 있는 한국당이 어떻게 저랬을까 싶다.

이 문제로 한국당이 사퇴를 촉구한 특감반 총책임자 조국 민정수석의 반응에도 분노가 서려 있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미국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 ‘No Surrender’(굴복하지 않아)는 투쟁, 전쟁에서 결코 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가사 중 ‘밖에는 격렬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겨울밤 방어를 맹세한 병사들처럼 퇴각도 굴복도 없다’는 구절이 있다.

‘전쟁’ ‘방어’ ‘퇴각’ ‘굴복’이 진을 쳐버리면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어야 할 정치는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조 수석은 8년 전 대담집에서 자신은 ‘짐승의 비천함’ ‘야수적 탐욕’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핵심 참모인 민정수석의 말과 행동은 ‘대통령 정치’의 일부다. 그래서 쉽게 분노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는 ‘야수’나 ‘짐승’의 면모를 닮고 싶은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7년 전 자서전 서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거론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분노 같은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소중히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기약 없이 집요하게 이어지는 ‘적폐 청산’의 대상들은 그 분노가 청산의 출발이자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분노에 휩싸여 보복을 다짐한다. 악순환이다.

세밑 ‘장자’ 한 구절을 읊으며 분노를 다스리고 새해를 맞으면 좋겠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뽑아낸 문장이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책받침 두께 정도의 얇은 틈새를 천리마가 휙 지나가는 것과 같다. 홀연할 따름이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청와대 특별감찰반#불법 사찰 의혹#김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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