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민주화, 최근엔 페미니즘”…달라진 대학가 헤게모니

홍석호기자 입력 2018-11-29 17:06수정 2018-11-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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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같으면 공약이라도 훑어보는데, 이번엔 읽어보지도 않고 찍었어요.”

29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난 이 대학 4학년 정모 씨(26)는 이달 중순 진행된 총학생회 투표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 씨는 “한 선거운동본부(선본)가 ‘페미선본(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의미)’이라고 들었다”며 “지금까지 단과대와 총학 투표를 합쳐 10번 넘게 참여했는데 그 때마다 학내 복지보다 정권비판에 몰두하는 운동권 선본은 찍지 않았다”며 “이제는 선본이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지에 따라 투표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 달라진 대학가 헤게모니

대학생 사회의 헤게모니가 변하고 있다. 학생들을 대표하는 총학생회 선거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주요 대학 총여학생회를 폐지하는 추세와 맞물려 총학 선거에서도 페미니즘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과거 총학 선거에선 ‘민족주의계열(NL)’ ‘민중민주계열(PD)’ 같은 운동권 계파 노선이 투표의 중요한 잣대로 작용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학생 복지를 강조하는 ‘비(非)운동권’이 떠오르면서 운동권인지, 비운동권 성향인지가 학생들의 표심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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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대 총학선거에 나온 A 선본은 후보가 여성주의 학회와 소수자인권위원회, ‘H교수 사건대응을 위한 학생모임(H연대)’ 소속이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친(親)페미니즘’으로 분류됐다. H연대는 사회학과 H교수의 갑질을 규탄하며 서울대본부 앞에서 120일 가량 천막농성을 벌인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대화방에서 “한남(한국남성의 준말로 비하의 뜻이 담김)의 절반을 날려 달라” “왜 반만 날리나. 다 날려야지” 같은 남성혐오적 발언이 오간 사실이 폭로된 뒤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비판을 받았다. 결국 A 선본은 43.0%(4112표)의 지지를 받아 49.4%(4725표)의 지지를 받은 B 선본에 밀려 낙선했다.

A 선본 관계자는 “공식적인 절차를 통한 평가보다 익명 커뮤니티를 통한 평가가 중심이 된 것 같다”며 “밤낮 없이 페미니즘 이슈가 언급되는 상황에서 사실이 아닌 내용이 언급되는 것은 아쉬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A 선본에 대한 비판글 중에는 “A 선본이 당선되면 페미니즘 인사들이 서울대에서 활개를 칠 것” “‘이수역 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성명이 총학생회 명의로 나올 것” 같은 추측성 글도 적지 않았다.


● 페미니즘 공약 놓고 찬반 갈려

페미니즘이 총학생회 선거의 주요 이슈가 된 것은 서울대만의 상황이 아니다.

홍익대 3학년 윤모 씨(24)는 “올해 홍대 총학생회 선거에도 두 선본이 나왔는데, 한 선본은 운동권 후보와 페미니즘 지지 후보로 구성됐다”며 “학교 커뮤니티 등에서 정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이 선본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확산됐고 결국 떨어졌다”고 전했다. 충남대생 김모 씨(24)는 “총학생회 후보 공약 중에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관련된 내용이 있으면 뽑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총학생회는 학생의 대변인인데 불필요한 정치색을 띠는 것은 학생의 편의나 권익과 무관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반대로 페미니즘 공약을 한 선본을 지지하겠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서울 소재의 한 사립대에 재학 중인 유모 씨(22·여)는 “대학생과 총학생회는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과거에 민주화였다면 최근엔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여대 재학생 김모 씨(23·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후로 운동권 총학생회가 지지를 받았지만, 최근엔 전반적으로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진보적인 자세를 가진 학생회가 눈에 보인다”고 전했다.

● 성평등이 핵심 이슈로…군복 입은 여성 후보 사진도

페미니즘을 포함한 성평등 이슈가 대학가의 중요한 이슈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은 다른 학교 총학생회 선거과정과 공약을 살펴봐도 두드러진다.

28일 연장투표를 통해 총학생회를 뽑은 중앙대는 총학생회 산하 성평등위원회가 출마 선본에게 ‘인권’과 ‘소수자’에 대한 의견을 묻는 공개질의서를 보내고 그 답변을 SNS에 공개했다. 예비역이나 유학생에 대한 질문도 포함됐지만, 전체 질의의 절반가량이 성평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에 대한 것이었다.

단독으로 출마한 선본이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약을 내놓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다. 특정 성향이 강한 선본이라고 낙인찍히면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거나 반대표가 과반수를 넘겨 낙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투표가 진행 중인 한양대 총학생회에 단독 출마한 선본은 남학생 두 명으로 구성됐지만 남자휴게실 신설과 여자휴게실 시설 개선을 묶은 공약을 내놓았다. 학교 내 몰래카메라 탐지 의무화와 군 복무 중 학점 취득 같은 공약도 자료집의 같은 페이지에서 약속했다.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총학생회는 정·부후보가 모두 여학생이지만 군복무 학점 이수제와 복학생 복수전공 신청 가능 공약을 냈다. 자료집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후보 사진을 찾을 수도 있었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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