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이 만드는 새로운 가치’…크라우드펀딩으로 숨통 트이는 문화예술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8일 1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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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0여 명이 제작을 후원한 한국 전통 귀신 사전 ‘동이귀괴물집’. 텀블벅 제공.
8800여 명이 제작을 후원한 한국 전통 귀신 사전 ‘동이귀괴물집’.
텀블벅 제공.
요리, 여행 등을 소재로 ‘덕후’를 위한 책을 만드는 ‘The Kooh’ 편집장 고성배 씨(34)는 올 6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원금액의 0 개수를 잘못 본 건 아닐까.’ 고 씨는 자신이 갖고 싶은 책을 200~300권 제작해 독립출판물 전문서점 등을 통해서 판매해 왔다. 그러다 올 4월 한국 전래 귀신이나 괴물을 일러스트와 함께 담은 책 ‘동이귀괴물집’을 만들겠다며 텀블벅에서 후원자를 모집했다. 목표 금액은 200만 원. 한데 두 달 만에 후원자 8881명이 1억4537만6000원을 냈다. 무려 9200권을 선판매한 셈이다.

‘연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크라우드펀딩’이다. 크라우드펀딩이 활성화되면서 문화예술계 지도가 바뀌고 있다. 특히 소규모 문화예술창작자들이 숨어 있던 후원자, 소비자를 만나면서 숨통이 트이고 있다.

크라우드펀딩은 다수의 개인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의미한다. 자금력이 부족한 스타트업 기업이 온라인 플랫폼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창작자가 추진하려는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올리고 목표 후원 금액이 달성되면 나중에 후원자들에게 창작물로 보상하는 ‘리워드’ 방식이 일반적이다. 국내 크라우드펀딩 업체 10여 개 가운데 문화예술 후원이 많이 이뤄지는 곳은 단연 텀블벅이다. 2011년 설립해 성공한 프로젝트는 약 8000건(누적 후원금 500억 원). 총 프로젝트 가운데 30% 가까이가 문화예술 분야다.

고 씨는 “전래 판타지 캐릭터를 원하는 독자가 이렇게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창작을 계속하는데 정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크라우드펀딩은 마니아들이 존재하는 서브컬처(Sub-Culture·주변부 문화) 분야에서 특히 힘을 발휘한다. 취미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 동호회가 있지만 판매 목적 활동은 제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크라우드펀딩을 활용하면 수요 예측도 가능하다. 국내 미발매된 셜록 홈스 소재 보드게임의 한글판 출시 프로젝트로 최근 2100여 명으로부터 1억1300여만 원을 후원받은 창작자는 “상상도 못한 결과”라고 크라우드펀딩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지난달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공공 전시 프로젝트 ‘한국 건축의 미(美)’. 내부에는 빛과 그림자를 매개로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 연구자들의 프로젝트 그룹 ‘CFL’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전시 비용을 
후원받았다. 텀블벅 제공.
지난달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공공 전시 프로젝트 ‘한국 건축의 미(美)’. 내부에는 빛과 그림자를 매개로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 연구자들의 프로젝트 그룹 ‘CFL’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전시 비용을 후원받았다.
텀블벅 제공.

창작 비용이 부족한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작지 않은 힘이 되고 있다. 건축 전공 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CFL(Context Free Lab.)’은 크라우드펀딩으로 1500여만 원을 모아 지난달 초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전시를 열었다.
후원자들의 모금으로 후반 제작비를 마련한 다큐멘터리 ‘Sleepers in Venice’. 텀블벅 제공.
후원자들의 모금으로 후반 제작비를 마련한 다큐멘터리 ‘Sleepers in Venice’.
텀블벅 제공.
현대미술 작가 8인의 베니스비엔날레 도전기를 담은 예술 다큐멘터리 ‘Sleepers in Venice’의 후반 작업 제작비도 모금에 성공했다.

크라우드펀딩은 팬 층을 모으는 플랫폼이 된다. ‘프리즘오브’(11호 발간 예정)는 한 호에 한 영화만 자세히 다루는 형식의 잡지다. 텀블벅에 발행 프로젝트를 산발적으로 올리다 8호부터는 고정적으로 올리고 있다. 발행인 겸 편집장 유진선 씨(26)는 “호별로 최대 2500명, 평균 600~700명이 우리 잡지를 후원했다”며 “후원자인 독자와 바로 소통하면서 요구를 확인하기 편해 고정 독자층을 모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기성 아티스트와 출판사가 새로운 팬을 확보하는 기회로 크라우드펀딩을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장수 밴드 ‘크라잉넛’은 정규 8집 ‘리모델링’ 제작비 일부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마련하고, 지난달 27일 기념 공연을 했다. 크라우드펀딩을 많이 활용하는 젊은 층과 접점을 확대하려는 시도다. 출판사 창비는 맨부커상을 받은 퀴어 소설 ‘아름다움의 선’을 최근 번역 출간하면서 후원 프로젝트를 올려 200명의 후원을 받았다.

건물이나 배경을 그려 웹툰 작가 등이 활용하도록 판매하는 ‘스케치업’ 후원 프로젝트가 최근 활성화되는 등 창작 관련 새로운 시장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등장하기도 했다.

이용제 계원예술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문화예술 창작자는 늘 생존 문제로 위태로운 것이 현실인데 크라우드펀딩으로 기존에 없던 시도를 해볼 만한 바탕이 마련되고 있다”며 “후원자에게 유형의 보상을 줄 수 있는 분야뿐 아니라 기초 연구처럼 무형의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까지 후원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 작지만 함께하면 의미있는 행동, ‘참여형 크라우드 펀딩

대구청소년창의센터 소속 청소년들이 지난해 8월 해외 소재 문화재 환수 기금 마련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서 후원자들에게 제공한 롤케익. 오마이컴퍼니 제공.
대구청소년창의센터 소속 청소년들이 지난해 8월 해외 소재 문화재 환수 기금 마련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서 후원자들에게 제공한 롤케익.
오마이컴퍼니 제공.
“처음에는 우리 얘기에 관심이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멋진 프로젝트 응원합니다’라는 댓글이 달리더니 한 달 만에 100만 원 목표액을 채웠죠. 지금도 믿기지 않는 경험이에요.”

유시현 양(18)은 지난해 7월 뉴스를 보다 궁금증이 생겼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문정왕후의 어보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것. 해외에 뺏긴 우리나라 문화재가 16만여 점에 이른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유 양은 대구청소년창의센터에 함께 다니는 친구 4명과 의기투합해 지난해 8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오마이컴퍼니’에 해외 소재 문화재의 실상을 알리고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후원자들에게는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뒤뜰에 있는 이천오층석탑과 프랑스에서 소장 중인 직지심체요절 등 주요문화재를 형상화한 배지와 롤케익을 선물했다. 한 달 만에 100만 원을 모금한 이들은 세금 등을 제외한 89만 원 전액을 올해 1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기부했다. 유 양은 “올해 9월에는 대구남부경찰서와 함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후원하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했는데 160만 원 넘게 모였다”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작지만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사회 이슈에 참여하는 캠페인성 프로젝트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동안 후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이들에게 특히 큰 힘이 된다는 평가다.

올해 1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와디즈’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후원을 위한 예술작품이 담긴 휴대전화 케이스’라는 펀딩이 시작됐다. 전문작가들이 위안부 소녀의 밝은 모습을 그린 휴대전화 케이스를 후원자들에게 선물하고, 수익금 전액을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전달했다. 다가오는 겨울을 앞두고 유기동물들의 방한용품 구입을 위한 금액을 마련하는 ‘미미야. 이번 겨울은 따뜻할거야’(텀블벅)나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파란장미’(와디즈) 등 다양한 참여형 펀딩이 진행되고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참여형 크라우드 펀딩의 증가는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로, 한국 시민사회의 성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유원모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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