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일 단식했던 87세 설조스님 “종단 적폐 청산은 내 숙명”

  • 뉴시스
  • 입력 2018년 10월 7일 13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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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斷食). 음식을 끊는 행위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 그만큼 굳은 의지를 세상에 드러낸다. 누군가 단식을 한다면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기록된 올 여름, 여든 살이 넘은 설조스님(87)은 조계종의 적폐청산을 요구하며 가마솥 더위 속에 40일 넘게 곡기를 끊었다.

건강 악화로 병원에 이송됐다 퇴원해 불교계 정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노 스님을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해영빌딩 3층에서 만났다. 스님을 중심으로 조계종 적폐청산을 염원하는 불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정정법회’의 작은 ‘집들이’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집들이 시작 두시간 전이었지만 사무실은 손님맞이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단식해도 바뀌지 않는 부조리…“돈 씀씀이부터 통제해야 부패 차단”

“이름은 제가 지었습니다.”

‘정정(淨正)’의 뜻을 설명하던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맑을 정, 바를 정자입니다. 종교가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혼탁한 조계종을 맑게 해서 사회를 바르게 이끌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정정법회 구상은 단식 후부터 시작했다. 스님은 “단식을 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해도 조계종이 변화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설정 전 총무원장의 퇴진과 새로운 총무원장의 선출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조계종 논란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종 비위 의혹이 제기된 설정 총무원장을 중심으로한 기득권 세력을 향해 여러 신자와 스님들이 적폐청산을 요구했다. 그리고 지난 5월 MBC ‘PC수첩’에서는 설정스님을 비롯한 조계종 인사들에 대한 갖가지 재산, 여성 문제 등을 제기했다.

설조스님의 장기간 단식과 언론의 비판 보도로 결국 설정스님은 지난 8월21일 퇴진했고 조계종단은 차기 총무원장 선거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설조스님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기존 조계종의 기득권을 잡고 있는 적폐세력 정리가 우선이라고 했다. 선거 후보로 나선 4명 중 3명은 ‘종단 기득권 세력의 불합리한 상황을 목도했다’며 후보직을 내려놓기도 했다. 결국 원행스님이 단독후보로 출마해 당선됐고 원로회의는 스님을 인준했다.

“설정 총무원장이 물러나는 것은 물론 관련 무자격자들이 모두 물러나고 잘못된 관습들이 모두 바뀌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바뀐다고 종단이 바뀌지 않습니다. 특정인 교체가 아니라 교단의 기본 질서가 교정돼 부조리가 시정될 때까지 정정법회 활동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구체적인 목표는 ‘돈의 투명한 이용’이다. 스님은 “신도들의 성금이 투명하게 사용되고 그 내역이 공개되는 등 돈의 씀씀이가 통제돼야지만 승려의 부패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며 “종단 정관이나 종법을 바로잡아 제도상의 변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힘 부치지만 종단 개혁은 포기할 수 없는 의무”

스님이 단식을 시작한 날은 지난 6월20일. 그리고 7월30일 급격한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꼬박 3주 입원 후 퇴원한 뒤 쉴 새가 없었다. 조계종 선거에 대해 쓴소리를 내는 동시에 정정법회 꾸리는 데도 사람들과 머리를 맞댔다. 말 그대로 ‘논스톱’ 행보다. 몸에 무리가 없을지 주변의 걱정이 많다.

건강 질문에 스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 선생님 말대로 음식을 조심하고 과식하지 않고 있다”며 “지난 1일에도 검진을 했는데 특별한 병 없이 상태가 양호하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전했다.

41일 간 단식을 하던 시간에 대해 스님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고 회상했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객들을 만나고 나면 금세 점심시간이 옵니다. 이후 스님들을 만나고 언론인들과 인터뷰를 하다 보면 옆 조계사에서 저녁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지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수 있나’ 이런 생각을 처음했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우리가 인생 100년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면 인생 100년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스님은 일과의 대부분을 교단이 당면한 과제를 정리하고 이를 정정법회 구성원들과 의논하는 시간으로 갖는다. 입원 중 제대로 가지지 못한 정진의 시간도 필요하다. 몸에 큰 이상이 없다지만 이미 고령인 스님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까.

스님은 “할 게 정말 많은데 몸이 늙었다”며 “인생이 많이 남지 않아 하루하루 그냥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힘에 부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묻자 스님은 ‘포기할 수 없는 의무’라는 표현을 썼다.

“속세의 말로는 ‘숙명’이라고나 할까요. 1960년대 중년, 김소운 선생의 수필을 읽었어요.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디다. ‘설사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문둥이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어머니니 버릴 수 없다’고요. 선생은 어머니를 조국에 빗대 이런 글을 썼지요. 나에게는 그 어머니가 교단입니다. 내가 속한 교단이 사람들의 조소와 걱정거리가 돼도 나는 이 교단을 버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이 교단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 제 숙명이자 포기할 수 없는 의무인 셈이지요. 어찌 보면 나의 ‘짐’인데 툭 털어버리고 싶은 짐이 아니라 내가 짊어지기로 결심했기에 끝까지 안고 가는, 그런 것이지요.”
◇이광수 ‘원효대사’ 읽고 19살에 출가…기독교인인 도산 안창호에 깊은 감명

스님이 그 ‘짐’을 짊어지기로 한 것은 10대 때였다. 강원도 양양의 명문가이던 집안 가세가 기울었다. 일제강점기, 변화된 환경에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던 암울한 사춘기 시절, 소년은 희망을 찾고 싶었다. “또래보다 조숙”했던 소년은 그 희망을 종교에서 찾고자했다. 이웃을 따라 교회에도 나가봤지만 성경 말씀이 잘 이해가 안 갔다. ‘믿으면 이해된다’는 목사님의 말에도 수긍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운명의 책을 읽었다.

“이광수 선생의 ‘원효대사’였습니다. 그리고 ‘세조대왕’과 같은 책도 읽었죠. ‘해탈’, ‘수행’ 등의 말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모든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궁금도 했고요. 그때부터 불교 관련 책을 읽고 스님들을 만나면서 흔히 말하는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알아갔습니다.”

19살의 소년은 ‘가출’(스님은 출가 대신 가출이라고 표현했다)을 결심했다. 집을 나와 간 곳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이후 설악산의 신흥사와 경기도 과천의 청계사를 거쳤다. 1980년 전두환 정권 시절 대규모 불교 탄압사건이었던 10·27법난 때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여래사의 회주로 있었다. 이후 한국으로 와 1994년 종교개혁회의 부의장과 불국사 주지를 지낸 후 충북 보은에 위치한 속리산 법주사 원로스님 등을 지내며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그 시절 스님은 자신의 ‘롤모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났다고 했다.

“기독교인이었던 청년 도산의 제1과제는 ‘겨레 사랑’이었어요. 교회에 십자가도 못 달던 시절 교회를 빌려 당시 몇 없는 전도사님도 불러와 예배를 드리게 했죠. 그런데 모든 예배를 애국가로 시작했어요. 저는 그게 정말 충격이었어요. 지금도 내가 법회 시작 전 애국가를 부르겠다고 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도산 선생은 그렇게 했죠. 종교는 그 자체로 필요하기보다는 인류를 복되게 하기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준 셈이지요. 암흑기의 선각자셨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겨레가 걱정하는 수많은 갈등이 있어요. 지역갈등,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갈등, 남북 갈등이요. 이런 갈등을 풀기 위해 종교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계종이 ‘맑아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불의에 대적하지 않았던 내 지난날 비겁…다음 생에도 스님으로”

성인이 된 후 평생을 정진하며 살아온 노스님은 자신의 지난날을 “비겁했다”고 평가했다.

“통일운동가인 백기완 선생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은 독재 시절 온갖 고초를 겪으며 형무소에서 힘들었다지요. 그러나 저는 전두환 시절의 법난 때 미국으로 도망을 갔어요. 유치장에 갇혀본 적도 없습니다. 어린시절 순사한테 뺨 한 대 맞은 적이 없지요. 항상 현장의 불행을 도망쳐서 면했습니다. 단 한 번도 불의에 당당하게 대적하지 않은 것이지요. 어쩌면 지금 조계종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제 죄도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지금이라도 (조계종 적폐청산에) 조그마한 보탬이 돼서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요.”

그래서 스님은 다음 생에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젊어서 출가해 수행에 더 매진하고 싶습니다. 금생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그 수행력으로 겨레와 고통을 나누는 제 내세에 대한 작은 희망이 있습니다.”

이날 오후 6시 소규모 집들이는 법회 형식으로 열렸다. 20여명의 불자와 종교계 인사가 모였고 조계종의 문제와 정정법회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법회의 마무리를 알리는 ‘사홍서원’ 독송 후 누군가가 애국가 제창을 제의했다. 설조스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새 사무실에 애국가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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