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구운 돼지고기와 소득주도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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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1부장
배극인 산업1부장
어느 날 소년 보브는 불을 지피다 그만 큰불을 냈다. 집이 불타 무너지면서 키우던 돼지 떼가 산 채로 불타 버렸다. 놀란 보브는 불탄 돼지에게 손을 갖다댔다가 화끈거리자 재빨리 입으로 가져갔다. 난생 처음 구운 돼지고기를 맛본 순간이었다. 아이가 기막힌 맛을 보았다는 소문이 온 마을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집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1800년대 초 영국 수필가 찰스 램의 수필집에 등장하는 우화다. 미 해군사관학교 국가안보전략 교수인 재커리 쇼어는 ‘생각의 함정(Blunder)’이란 책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누구나 원인 혼란에 따른 인지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말라리아 질병을 대하는 고대 로마인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죽었는데, 모두 마을 근처 늪지대를 다녀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럽인들은 이후 1000년 이상 늪의 나쁜 공기가 원인이라고 믿고 발병 때마다 늪의 물을 전부 빼냈다. 지금 우리는 말라리아가 부패한 물에서 생기는 학질모기가 옮기는 혈관 기생충이 원인으로, 다른 물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쇼어 교수는 인지함정은 그릇된 추론에서 비롯된 유연하지 못한 사고방식으로, 기존의 경직된 생각과 선입견만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상당 부분 정서적 요인들이 작용한다고도 했다.

인지함정 사례들을 보면서 현 정권 경제팀을 떠올리게 된다. 집착을 못 버리고 있는 소득주도성장 얘기다. 소득이 늘면 소비가 늘고 생산이 늘어 기업이 성장하고, 그 결과 일자리도 늘고 경제도 활성화된다는 메커니즘이다. 지금까지 결과는 인과관계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점을 입증한다. 경제학 원론에서는 기업이 성장해야 일자리가 늘고 소득도 늘어 소비가 늘어난다고 한다. 세계 각국에서 기업 살리기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 경제팀은 소득을 순환 고리의 출발점에 놓다 보니, 시장 원리에 어긋나는 정책을 쏟아내고 후유증을 세금으로 막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최저임금 인상이다. 약자 보호는 필요하나 시장 균형에서 현저하게 벗어나면 수요와 공급 균형이 무너져 일자리 공급이 줄어드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다. 중소기업의 일자리가 줄고, 식당과 편의점의 파트타임 일자리도 무인화 자동화로 대체되고 있다. 소비자 물가가 뛰면서 근로자 실질소득도 줄고 있다. 여기에 근로시간 단축까지 시행되면서 야근·특근수당이 사라졌다. 소득을 늘리자고 한 게 소득 총합을 오히려 줄이는 역설에 갇혔다. 복지 문제를 경제 정책으로 풀려 했기 때문이다.

설령 소득이 늘어도 소비가 늘지 않으면 소득주도성장은 불발탄이다. 소비는 앞으로 내 주머니 사정에 대한 기대심리가 중요하다. 물가는 뛰고, 주가는 떨어지고, 기업들이 잔뜩 움츠러들어 투자보다 현금 비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심리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과거 일본식 디플레이션 우려도 제기한다. 소비 부진으로 생산이 줄고 기업 실적도 악화돼 일자리와 소득이 줄면서 경기가 갈수록 침체되는 악순환이다.

우리 기업들은 으레 엄살이고, 이 정도 때리는 건 약이라는 생각도 오류다. 국내 재계 맏형인 삼성도 세계 시장에선 호시탐탐 급소를 노리는 포식자들에게 포위돼 있다. 더구나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넘어가는 파괴적 기술혁신의 시대다. 공산당이 규제를 마음대로 풀 수 있는 중국은 거의 모든 신산업 분야에서 빅데이터를 축적하며 한국 기업을 따돌리고 있다. 재정으로 언제까지나 소득주도성장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가 아니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
#소득주도성장#인지함정#최저임금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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