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소영]회색은 거무스름한가, 희끄무레한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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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동 섞인 회색지대에 있는 실험실 소속 이공계 대학원생들, 스스로 ‘학생근로자’로 인식
학업은 ‘지원’, 업무는 ‘보상’ 의미로… 지원도, 보상도 다 필요하다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유학 시절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학과 어느 교수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 첫 번째 회의에서 이 교수는 외부 지원을 받는 과제에서 대규모 설문조사를 했는데 데이터 수집이 끝나 이제 통계만 돌리면 된다고 했다. 원하는 통계량을 제시하면서 이 정도면 5시간이면 되겠지 하고는 시간당 20달러를 제시했다.

당시 도서관에서 부업으로 데이터 관리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시간당 12달러니 교수가 제시한 액수는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얼른 일을 받아들고 집에 돌아와 데이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웬걸, 이게 금방 수집한 자료라 상당한 전(前)처리 작업이 필요했다. 통계 분석에서 전처리 작업이 80∼90%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종교학과 교수는 데이터만 있으면 짠 하고 나오는 줄 안 모양이었다.

꼬박 이틀을 쓴 후 결과를 가져갔더니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렸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면서 자기 연구실이 넓으니 강의실에서 작은 책상을 갖고 와 자기 연구실에서 작업하라고 했다. 작업 시간이 몇 배 더 걸려 더 많이 달라고 얘기할 작정이었던 나는 버벅대는 영어로 집에서 작업하겠다고 설명하느라 정작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이 사건으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하나는 남이 맡기는 일을 할 때는 어떤 성격의 일을 얼마나 하게 되는지 꼼꼼히 챙겨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쓰는 일이 꼭 창의적인 게 아니라 ‘노가다’일 수도 있다는 것.

20년 전 교훈이 새삼스러운 것은 요 몇 년 사이 불거진 이공계 학생연구원 처우 문제 때문이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수업만 듣는 게 아니라 정부나 산업체에서 수주한 연구과제에 참여하면서 관련 내용으로 학위논문도 작성한다. 말 그대로 ‘학생’이자 ‘연구원’이다. 학생이면 밤을 새워 공부해도 그게 모두 자기 게 되겠지만, 어쩌다 맡게 된 과제로 밤을 새워 일하면 아무리 그 과정에서 실험 노하우 등 얻는 게 있어도 왠지 남의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학생이자 연구원으로서 이공계 대학원생의 일상은 학업·연구라는 흰색의 원과 외부 과제 및 관련 업무라는 검은색 원이 벤다이어그램처럼 겹쳐 있는 모양새다. 분야에 따라서는 두 원이 거의 겹쳐져 외부 과제가 자기 연구로 이어지는가 하면, 반대로 겹쳐지는 부분이 너무 적어 학업은 학업대로 과제는 과제대로 병행해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과학기술 연구개발 체계하에서 인문사회계와 달리 이공계 대학원생의 일상은 완전 흰색, 완전 검은색이 존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대부분 거무스름한 흰색이거나 희끄무레한 검은색이다. 이 회색지대에서 학생연구원의 처우는 이들이 정신적 에너지를 쓰는 행위가 연구인가 노동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참고로 2014년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에서 실험실 소속 대학원생 17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58%가 스스로를 ‘학생근로자’로 인식하였다.

새 정부 들어 학생연구원 처우 개선을 위해 크게 두 가지 방향이 모색되고 있다. 근로계약과 스타이펜드(stipend)라는 학연장려금으로 각 대안에 대한 찬반 논란은 최근 신문지상을 달구고 있는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무 논란 구조와 비슷하다. 학연장려금의 경우 대학원생에게 제공할 최저금액 도입 혹은 상향 조정에서 예산 부담과 도덕적 해이 문제가 나오고 있고, 근로계약은 예산도 부담이지만 연구과제 수행이 부품 조립하는 일이 아닌 이상 연구 투입 시간 산정이 어렵다는 문제를 거론한다.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이들 개선책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창의적 정신활동으로서 연구는 ‘지원’하는 것이고, 노가다적 정신활동으로서 노동은 ‘보상’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공계 학생연구원의 정신적 활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연구와 노동이 섞인 회색 원이기 때문에 지원이냐 보상이냐를 택할 문제가 아니라 지원도 보상도 다 해야 한다. 특히 노동에 가까운 업무에 있어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얼마나 하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자발적 연구에서는 모르는 길을 한참 헤매는 것이 풍요로운 경험이나 노동에서는 그저 괴로움일 뿐이기에.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이공계#대학원생#학연장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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