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피플]故 바버라 부시“미국은 (너 말고도) 너무 많은 ‘부시’를 가졌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8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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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일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전 대통령 부부와 기념촬영 하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부부. 맨 오른쪽이 바버라 부시 여사. 동아일보DB
2008년 12일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전 대통령 부부와 기념촬영 하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부부. 맨 오른쪽이 바버라 부시 여사. 동아일보DB
한 대통령의 부인으로, 또 다른 대통령의 어머니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바버라 부시 여사가 17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자택에서 남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향년 92세.

최근 건강이 악화한 부시 여사는 숨지기 이틀 전 “더 이상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생의 마지막을 담담히 준비했다. 수십 년간 갑상샘 호르몬이 과잉 분비되는 ‘그레이브스병’을 앓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최근 울혈성 심부전과 만성 폐쇄성폐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부시 가문의 대변인 짐 맥그래스는 “부시 여사는 건강이 악화하는 상황에서도 돌처럼 단단했고, 자신보다 남을 더 걱정했다”라고 전했다.

부시 여사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소탈함’에 있다. 그는 1953년 세 살배기 딸 로빈을 백혈병으로 잃은 뒤 스트레스로 20대 후반부터 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했다. 남편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영부인이 아니라 대통령의 엄마처럼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백발 머리를 고수했다. 그는 훗날 “염색한 머리가 나한테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 머리 색 덕분에 대중들이 나를 ‘국민 할머니’로 생각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 방송 인터뷰에서는 남편이 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때(1989년)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세 줄짜리 모조 진주 목걸이에 얽힌 뒷얘기도 털어놨다. 그는 “진주 목걸이는 목주름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소용이 없다. 얼굴 전체를 목걸이로 덮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소탈하지만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집행자(enforcer)’로 통했다.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따끔하게 지적했다. 남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이 대통령 재임 시절, 침실 의자에 앉은 채로 커피 테이블 위로 발을 올렸다. 그러자 부시 여사는 “당신이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먼저 테이블에서 발을 내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남 조지 W 부시는 43대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차남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2016년 대권 도전은 끝까지 반대했다. 당시 그는 “아들아, 미국은 (너 말고도) 이미 너무 많은 ‘부시’를 가졌단다”라며 설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여사는 전면에 나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 보다는 정파를 넘어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1989년 ‘바버라 부시 재단’을 설립해 미국 내 문맹 퇴치 운동에 앞장섰고 봉사활동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부시 여사는 남편과 73년간 함께 하며 역대 대통령 부부 중 가장 긴 결혼생활을 유지한 부부로 꼽힌다. 그는 16세 때 한 크리스마스 댄스파티에서 당시 해군 조종사이던 부시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5남매를 훌륭히 키워냈다. 부시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던 존 수누누는 “부시 여사가 백악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대통령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부인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고 16일 피플지에 밝혔다.

부시 여사는 장수 비결로 ‘좋은 의사와 훌륭한 남편’을 꼽을 정도였다. 부시 여사의 손녀 제나 부시는 최근 NBC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여전히 매일 밤 할머니에게 ‘사랑해 바비(바버라의 애칭)’라고 말한다”라고 밝혔다. 부시 전 대통령도 희귀병인 혈관성 파킨슨증후군을 앓는 등 건강이 악화된 상황임에도 부시 여사의 임종 전 그의 손을 하루 종일 붙잡고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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