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정치 보복도 정치 불능도 아닌 개헌의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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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총리 선출 집착 벗어나 장관들과 4대 권력기관장 국회 임명동의 추구하면 제왕적 대통령 견제에 도움
여권이 꽃놀이패 쥔 개헌… 아쉬운 야권이 욕심 버리고 못 빠져나갈 大義 내세워 개헌 기회 오히려 활용해야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청와대는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국민은 답답했다. 청와대가 정말 국회 통과를 목표로 했다면 논란거리가 수두룩한 개헌안은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통과도 되지 않을 개헌안이니까 대통령의 생각이나 맘껏 펼쳐 보이자는 것 같았다.

대통령의 생각이란 것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개헌안 중 ‘국회 의석은 투표자 의사에 비례하여 배분한다’는 조항은 사실상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다는 뜻이다. 대통령을 견제하려면 국회에 소선거구제에 바탕을 둔 거대 양당이 있어야 한다. 국회에 군소정당이 난립할 수 있는 선거제를 도입하자고 하면서 대통령제는 거의 현행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국회의 권력을 약화시켜 대통령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전제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두 제도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신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개헌안은 의미가 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국회의 국무총리 선출권이나 추천권을 요구했으나 청와대는 “대통령제와 맞지 않는 변형된 의원내각제”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거부든 수용이든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논의를 위한 진전이다.

국회가 총리 선출권이나 추천권을 갖게 되면 사실은 이원정부제가 된다. 현행 헌법처럼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영역이 겹치고 총리가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인 상황에서 국회의 선출이나 추천으로 권한이 강화된 총리가 대통령과 대립한다면 효율적 국가 운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통령의 권한은 무엇이고 총리의 권한은 무엇인지 구별해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대통령은 외치(外治), 총리는 내치(內治)로 구별한다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간단하지 않다. 그것을 미리 정하지 않고 총리를 선출하거나 추천하자고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누구 말대로 ‘20년 더 집권할’ 자신이 있어 대통령 권한을 약화시키는 시늉만 하고 넘어가고, 한국당은 그렇지 못해 분권형 총리에 목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 상황이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다. 민주당이 참패해서 또 다른 정치보복의 쓴맛을 볼 날이 올 수도 있고, 한국당은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정치 불능 시스템에서 헤맬 수도 있다. 헌법은 승자가 돼도 패자가 돼도 당당히 뛰어놀 수 있는 중립적인 그라운드로 여겨야 한다.

여당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통령 개헌안보다 더 내놓아야 하지만 야당도 총리 문제에서 반드시 승부를 보려 해서는 안 된다. 국회에 총리 선출권이나 추천권을 주지 않아도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할 다른 대안들이 없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 대상일 뿐인 장관들과 검찰총장 국가정보원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 4대 권력기관장을 국회 임명동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도 그런 대안 중 하나다.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장관을 비롯해 중앙정보국(CIA) 국장, 연방수사국(FBI) 국장 등 고위 공직자를 모두 상원의 인준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인준이 임명동의에 가까우냐, 인사청문에 가까우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정치문화의 차이를 고려할 때 임명동의는 한국식 인준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총리를 제외하고는 장관 등 행정부 요직에 대한 의회의 통제가 부족했기에 결국 제왕적 대통령제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것이 개헌 요구에 이른 요체다.

이런 반박이 가능하다. 총리와 감사원장은 현재도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하지만 독립적인가. 임명은 국회 동의를 얻어 해도 해임은 대통령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독립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문화는 더뎌도 발전하고 있어 당파성이 강한 인물이 총리나 감사원장이 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중남미 국가는 미국과 유사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제도만으로 되지 않는 정치문화적 요소가 있다. 정치문화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소용없다.

30여 년 만에 개헌이란 거대한 판을 벌여놓고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1987년에는 권력을 쥔 쪽이 망해버렸고 지금은 권력을 쥔 쪽이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 야권이 욕심을 버리고, 거부하지 못할 대의(大義)에 호소하지 않으면 개헌은 성공하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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