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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백 투 더 동아/11월 11일]촛불 한 개 때문에…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입력 2017-11-10 18:13업데이트 2017-11-1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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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사진. 동아일보DB

1977년 11월 11일. 서울 시내의 한 신문사 본사 TV 화면에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란과 맞붙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2차전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전북 이리시(현 익산 시) 주재 기자가 전화를 걸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리는 쑥대밭이다. 서울은 무사한가?” 그는 전쟁이 난 줄 알았다.

그날 이리역(현 익산역) 앞 삼남극장에선 오후 9시부터 한 인기가수의 ‘리사이틀 쇼우’도 열리고 있었다. 공연을 시작한 지 15분쯤 지났을 때 이 극장 지붕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사회를 보던 코미디언이 피투성이가 된 자기 몸을 돌보는 대신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뛰지 않았다면, 이 가수는 ‘가장 콘서트를 많이 연 가수’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실제로는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다이너마이트, 전기뇌관을 싣고 가던 기차가 이리 역(현 익산 역)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그 인기 가수는 1999년 총 공연횟수 8000회를 넘어선 하춘화 씨였다. 코미디언은 나중에 ‘콩나물 팍팍 무쳤냐?’는 유행어로 인기를 끈 이주일 씨였다. 하 씨가 이 씨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뜻에서 ‘내 쇼 사회자는 이주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 이 씨를 ‘키워줬다’는 건 유명한 일화.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 당시 전치 4주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던 가수 하춘화 씨. 폭발 사고 소식을 접하고 이리로 내려온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하 씨의 생사여부를 따로 확인할 만큼 당시 하 씨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실제로 하 씨의 생존 소식이 들린 건 사고 다음 날인 12일 저녁이었다. 동아일보DB

시작은 급행료였다. 원래 화약을 싣고 오는 기차는 역내를 바로 통과시키는 게 원칙. 하지만 배차 직원들은 급행료로 주머니를 불리고 있었다. 이 기차는 인천에서 26시간을 달려 이리에 도착했지만 급행료를 내지 못해 40시간 넘게 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루했던 호송원 신무일 씨(당시 36)는 막걸리 한 되,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기차로 돌아왔다. 11월 화물칸 안은 술 기운과 닭털 침낭 만으로 버티기엔 너무 추웠다. 몸을 덥힐 건 촛불밖에 없었다. 신 씨는 스르르 잠이 들었고 잠결에 촛불을 발로 차고 말았다. 그 촛불 한 개로 56명이 숨지고, 1158명이 다쳤으며 역 반경 4㎞ 안에 있던 집 9530여 채(당시 이리시 전체 집 73%)가 부서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전한 1977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당시 동아일보는 “사고가 나자 정진이 되어 시내가 암흑 속에 잠긴 채 곳곳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등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이루어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전했다.

진짜 못 생겨서 진짜 죄송해야 할 쪽은 코미디언 이 씨가 아니었다. 폭약과 뇌관을 함께 실을 수 없는 운송 원칙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뇌물을 주지 않으면 그렇게 위험한 열차를 이틀 가까이 역에 세워두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그 열차 안에서 촛불까지 켤 수 있었던 1970년대 대한민국 아니었을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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