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붓 만들기 50년… “글씨 공부하려면 붓의 성질부터 배워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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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전주 모필장 곽종찬

붓 한 자루에는 10만∼15만 올의 털이 들어가는데 털을 다루는 데 150여 번의 손길이 간다. 50년 넘게 붓을 만들어 온 전주의 모필장 명인 곽종찬 씨는 “붓 만드는 과정은 보는 사람이 속이 터질 정도로 지루할 정도이지만 서예는 붓이 먼저이고 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붓 한 자루에는 10만∼15만 올의 털이 들어가는데 털을 다루는 데 150여 번의 손길이 간다. 50년 넘게 붓을 만들어 온 전주의 모필장 명인 곽종찬 씨는 “붓 만드는 과정은 보는 사람이 속이 터질 정도로 지루할 정도이지만 서예는 붓이 먼저이고 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명필은 붓을 탓하지(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은 끝없이 좋은 붓을 탐해 왔다. 서예가들은 좋은 붓으로 글씨를 쓰면 “붓끝에서 글씨가 절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전주는 서예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조선의 명필 추사 김정희가 진가를 인정했던 창암 이삼만이 활동했고 근현대 서예에 큰 족적을 남긴 석전 황욱, 강암 송성용이 평생을 보낸 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류 여인숙이나 허름한 막걸리집 빛바랜 벽에도 서예 작품이나 동양화 한두 점은 걸려 있었다. 예전 같진 않지만 전북은 서예의 전통이 이어져 오는 곳이고 격년으로 열리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도 전북 서예의 명맥을 잇고 있다.

서예의 시작이 붓이니 전주 붓이 성했음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붓을 만드는 사람과 그 기술을 이르는 ‘모필장’은 안타깝게도 전통 문화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부각되지 못했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전주 붓의 명성을 3대째 어렵게 이어 온 명인이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4호 전주 모필장 곽종찬 씨(66)다.

○ 붓 만들기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

“보는 사람 속 터져요.”

여느 전통 공예품이 그렇듯 붓을 만드는 과정은 참으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이다.

붓 하나를 만드는 데 길게는 한 달이 걸린다. 붓 하나에는 10만∼15만 개(올)의 털이 들어간다. 털 작업에만 150번 넘는 손길이 간다. 붓은 털이 가장 중요하다. 우선 붓털의 끝이 뾰족하고 가지런해야 한다. 털의 모둠은 원형을 이루어야 하고 획을 긋고 난 다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짐승의 모든 털은 붓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겨울에 잡은 짐승의 털이어야 더 윤기가 있다.

짐승의 가죽에서 털을 채취해 솜털을 골라내고 다림질을 해서 구부러진 털을 편다. 얇은 스테인리스 판으로 털을 말아 찜통에 찐다. 털의 길이를 늘이기 위해서다. 이어서 털 위에 왕겨 재를 뿌리고 다리미로 다려 기름기를 제거한다. 기름기를 제거해야 털이 상하지 않고 오래간다. 하지만 기름기가 조금은 남아 있어야 붓의 탄력이 유지된다.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다. 값싼 중국산 붓은 이 과정을 약품으로 처리한다.

가장 어려운 과정은 ‘붓봉 끝보기 작업’이다. 거꾸로 박혔거나 끝이 잘린 털을 고르는 작업이다. 좋은 붓은 이 작업에만 몇 시간이 걸린다. 곽 명인은 털을 고를 때 자신이 고안한 ‘털채’를 사용한다. 이 채를 사용하면 털끝을 상하지 않고 고를 수 있다. 대나무를 다듬을 때도 직접 제작한 ‘치죽도’라는 칼을 사용한다.

음력설에서 정월 대보름 사이는 붓대로 쓸 대나무를 구하는 시기다. 갈수록 쓸 만한 대나무 밭을 찾기도 어렵다. 대나무는 물이 오르기 전인 겨울에 잘라야 한다. 대나무는 햇볕에 말려 깍지를 지그재그로 돌려가며 벗겨낸다. 그런 다음 황토와 모래를 섞어 문지른다. 황토는 대나무의 진액을 빼내는 작용을 한다. 그 상태로 보름쯤 두면 대나무는 뿌옇게 마르기 시작한다. 20일쯤 됐을 때 개울에 가서 씻어 말린다. 대나무 한 대에 10개 정도의 도막이 나오는데 골라내면 두 마디쯤 쓰게 된다.

“모든 과정을 알아야 제대로 된 붓을 만들 수 있어요. 대나무를 자를 때 그 특성도 알게 되거든요. 대나무를 베어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아요. 대나무는 깍지에 명치털 같은 가시가 있는데 아주 사나워서 며칠만 일하고 나면 손등이 새까맣게 됩니다. 긁힌 자리에 딱지가 앉아서죠.”

○ 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

곽 명인의 대표작은 ‘사동고리’다. 이 붓은 러시아의 전통 목제인형인 ‘마트료시카’처럼 큰 붓 속에 작은 붓들을 차례로 넣은 것이다. 작은 붓이 여러 개 들어가 있어 붓 한 자루만으로 다양한 글씨를 쓸 수 있다. 동그랗게 깎아내기 때문에 ‘동고리’란 이름을 붙였다. 붓이 네 개 들어가면 ‘사동고리’, 다섯 개 들어가면 ‘오동고리’다. 서울 문화재청 전시 때 여섯 개까지 들어가는 붓을 만들었다.

이전에도 세필 중필 대필이 하나로 된 ‘삼동필’이 있었다. 선비들이 휴대용으로 지니고 다녔던 ‘삼동필’은 전통 붓의 백미로 꼽혔지만 제작자 수가 워낙 적어 오늘날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유물이 되었다. 그는 군 입대 전인 1970년대 초 전통붓 ‘삼동필’의 형식을 다시 살려 현대적 미감으로 온전히 복원해 냈다.

대나무 자루 위에 무늬를 넣는 것도 독특하다. 재래식 인두를 사용하는 일종의 낙죽기법인데 물방울처럼 보이는 무늬는 그만이 낼 수 있다. 비법은 아직 아무한테도 전수하지 않았다. “예전에 광주에서 붓을 만드는 부부가 와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아직 넘겨줄 일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돌아가실 때 가르쳐주고 가세요” 하더라고요.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로 들리던데…….”

그의 붓은 초보자가 사용하기 어렵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예전 유명 서예가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붓을 주문 제작해 사용했다. 개인마다 선호하는 붓의 크기와 탄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력은 붓에서 나옵니다. 붓의 성질을 알아야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있습니다. 요즘 서예가들은 좋은 붓을 구하려는 성의가 부족하고 값싼 붓만 찾는 사람이 많아요. 어느 분야든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글씨 공부하는 사람은 붓의 성질부터 공부해야죠.”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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