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개성상인처럼… 강진 출신 ‘병영상인’을 21세기로 불러낸 향토연구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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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강진일보 편집국장 주희춘 씨

주희춘 씨가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에 올라 병영상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 씨는 “병영상인의 정신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가장 적절하면서도 강력한 경영기술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진군 제공
주희춘 씨가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에 올라 병영상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 씨는 “병영상인의 정신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가장 적절하면서도 강력한 경영기술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진군 제공
‘병영상인들은 고춧가루를 먹고 천길 물속을 달린다’, ‘병영상인들은 말꼬리로 만든 붓 12자루만 있으면 밖에 나가 1년 먹을 것을 벌어 온다’. 전남 강진 출신 ‘병영상인’의 뼛속 깊은 장사꾼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북에는 개성상인이 있고 남에는 병영상인이 있다’는 말처럼 조선시대 한양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송상이, 남쪽에서는 병영상인이 상권을 장악했다. 개성상인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져 왔지만 병영상인은 상대적으로 베일에 가려 있었다.

주희춘 씨(52·강진일보 편집국장)는 역사 속 병영상인을 21세기로 불러낸 향토연구가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출신인 주 씨는 지역신문을 만들면서 병영상인에 ‘필(feel·혹은 필·筆)’이 꽂혔다. 개성상인의 그늘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던 병영상인의 자취를 따라가며 관련 자료를 찾고 증언을 들었다. 지금은 희미해진 병영상인의 상인정신을 한국 기업가 정신의 모델로 조명하고 싶었다. 병영상인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두 권의 책까지 냈다. 기자 특유의 끈기와 열정으로 빚어낸 성과물이었다.

○ 병영상인의 역사를 찾아서


강진농고와 청주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5년간 지방지 기자로 일하던 주 씨는 199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진의 첫 지역신문을 창간한 뒤 지역민이 원하는 뉴스가 뭘까 고민했다.

“강진에서는 ‘북에는 송상(松商), 남에는 병상(兵商)’이라는 말이 꽤 오래 회자됐어요. 강진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 바로 병영상인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재를 시작했어요.”

그는 문헌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취재하면서 병영상인의 역사적 퍼즐조각을 하나씩 맞춰 갔다. 병영상인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 전라병영성 축조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광산현(광주 광산구)에 있던 전라병영성이 강진현으로 옮겨 오게 되자 징발자 수천 명이 병영에 몰리면서 군수용품과 생필품의 수요가 폭증했다. 자연스레 병영 사람들은 물자를 조달하는 상인이 됐다. 병영 재정을 충당하도록 조정에서 군인들에게 상거래 권한을 준 것도 상업 활성화에 영향을 끼쳤다.

병영상인이 전국 시장을 제패한 비결은 자금력도, 권력과의 유착도 아니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차곡차곡 쌓아나간 서비스 정신이 이들의 무기였다. 성냥 같은 작은 것 팔기부터 시작해 물건을 취급하는 법, 손님을 상대하는 법 등은 다른 상인들이 따라올 수 없었다.

병영상인에게도 위기는 닥쳤다. 1895년 동학농민군이 병영성을 함락한 것이다. 400년간 유지된 병영성이 몰락하면서 병영 지역은 폐허가 된다. 상업 기반을 잃은 병영상인들은 특유의 끈기로 다시 한 번 도약을 시도한다. 이들의 자본은 기초부터 배워 온 상술이었다.

주 씨는 2014년 펴낸 저서 ‘장사의 기술―600년 병영상인의 비밀’에서 병영상인의 장사 비법을 8가지로 정리했다. 전국적인 유통망과 효율적 관리, 과감한 투자, 도전정신과 겸손, 지리적 환경의 이점을 살리는 능력, 밑바닥 정신, 광범위한 시장 개척, 신용을 중시하고 동료를 배려하는 자세, 장사만 고집하는 프로근성이 그것이다.

그는 올 초 전남대 경영대 박사학위 논문 ‘병영상인의 상인정신 연구’를 통해 병영상인의 출현 시기를 통일신라 장보고 시대로 끌어올렸다. 828년 장보고 상단이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국제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강진을 중심으로 상인세력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강진에서 고려청자가 생산되면서 다시 한 번 중흥기를 맞았고, 전라병영 축조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는 게 그의 논지다.

그는 “병영상인의 정신이야말로 맨주먹으로 성장신화를 일군 한국형 기업가 정신의 원형”이라며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기업들에 병영상인은 적극적인 기술 개발과 시장 개척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발로 쓰는 강진 역사

그는 병영상인을 비롯해 해상무역에 밝았던 선조들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실제로 고대 뱃길인 강진부터 제주까지, 고려시대 청자뱃길인 강진부터 강화도까지 뗏목을 타고 항해했다.

지난해에는 근현대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남일 김재명 김향수 윤한봉 등 강진 출신 인물 27명의 생애와 일화를 기록한 ‘강진인물사’(전 3권)를 펴내기도 했다. 2010년부터 6년 동안 주민의 증언, 신문 기사, 호적과 학적부 등을 바탕으로 원고지 4000여 장을 썼다. 그동안 북한 태생으로 알려졌던 남일(1913∼1976)이 강진군 병영면 박동마을 출신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동창 및 주민의 진술과 병영초교 학적부를 통해 남일의 유년시절을 확인했다. 그러자 중국에서 6·25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잇따라 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남일은 강진에서 일본을 거쳐 소련에 유학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투에 참여해 무공을 쌓은 뒤 북한에서 정전회담 대표, 외상과 부수상 등을 지냈다.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구담(口談)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향토사 자료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병영상인이 만주까지 진출했다는 것도 구담으로 알았다. 2012년 병영면에서 취재를 하다가 60대 후반의 주민으로부터 “장모님이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포목장사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93세의 그 병영상인을 만나 당시의 생생한 활동상을 기록할 수 있었다.

요즘은 조선시대 강진 사람들의 표류사건에 관심이 많다. 다도해와 서남해안은 물길이 교차하고 계절풍 변화도 심한 데다 생필품과 진상품 운반선이 많아 표류사건이 빈번했다. 주 씨는 1828년 강진에서 제주를 가다가 표류해 일본 나가사키(長崎)현에 도착한 강진 주민 38명의 스토리와 당시 독일인이 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강진사람들 표류기에는 당시 풍습과 의복, 언어, 지리 등이 기록돼 서양학계에서는 200년 전 조선을 소개한 ‘하멜표류기’보다 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한다”며 “자료를 보충해 내년 이맘때 책으로 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 씨는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주민들이 고생한다며 막걸리 한잔하고 가라고 옷소매를 끌 때 ‘뭔가 하긴 했구나’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의 인물과 자료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이 천직인 것 같다”면서 싱긋 웃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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