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기자의 히트&런]고척 참사? 이게 한국야구의 민낯

이헌재 기자 입력 2017-03-09 03:00수정 2017-03-0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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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린 2006년 미국 대표팀은 화려했다. 데릭 지터, 알렉스 로드리게스, 켄 그리피 주니어 등 레전드 선수들이 차고 넘쳤다. 그 대회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대다수 미국 사람들이 야구를 하는지도 몰랐던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이 ‘우승 후보’ 미국을 7-3으로 꺾은 것이다.

그로부터 11년 후. 이번엔 한국이 기적의 희생양이 됐다. 한국은 제4회 WBC 1라운드 첫 경기에서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이스라엘에 1-2로 패했다. 이변의 원인은 비슷하다. 2006년 당시 미국 선수들은 느슨했다.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 이들에게 WBC는 시범경기와 비슷한 이벤트 대회였을 뿐이다.

올해 한국 대표팀이 딱 그랬다. 7일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0-5로 완패한 데 이어 8일 대만이 네덜란드에 지면서 1라운드 탈락이 확정된 뒤 한 대표팀 관계자는 “2006년 WBC 대표 선수들은 죽기 살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없다. 시대가 변한 것 같다”고 했다.

이번 대회 TV 중계 해설위원으로 나선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 박찬호는 “이게 한국 야구 수준인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한 지적이다. 4강과 준우승을 차지했던 제1, 2회 WBC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이 기대 이상의 성적이었을 뿐이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에는 정신력에서 졌고, 네덜란드에는 실력으로 졌다. 한국 야구의 민낯이 이번 대회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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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과 비교해 좋아진 것은 선수들에 대한 대우밖에 없다. 이대호(롯데·150억 원), 최형우(KIA·100억 원), 차우찬(LG·95억 원·이상 4년 기준) 등은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돈을 번다. 야구 좀 한다 싶은 선수의 기본 몸값이 50억 원이다.

이들에게는 몸이 재산이다. WBC는 병역 혜택도 없고, 금전적인 보상도 크지 않다. 기나긴 시즌을 앞두고 몸 바쳐 뛸 이유가 별로 없다. 박 위원은 “선수들이 배고픔을 모르는 것 같다.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고 했다. 실제로 이번 대회에 출전한 대부분의 투수는 시즌에 비해 구속이 3∼4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타선은 두 경기 19이닝 동안 1점밖에 못 냈을 정도로 침묵했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 야구에 더 이상 좋은 선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선수 구성 때부터 애를 먹었다. 2006년 제1회 대회부터 출전했던 김태균(한화)은 11년 뒤인 이번 대회에서도 중심 타선에 배치됐다. 1998년 방콕 아시아경기부터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던 임창용(KIA)은 19년이 흐른 이번 대회에서도 위기 순간에 등판해야 했다. 주전으로 뛸 만한 젊은 선수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은 4년 전 제3회 대회 때도 선수 구성에 어려움을 겪은 끝에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최근 들어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 인플레이션이 극성인 것도 같은 이유다. 좋은 선수가 수급되지 않으니 기존 선수들의 몸값이 뛸 수밖에 없다. 2006년 한화에 입단한 류현진(현 LA 다저스), 2007년 김광현(SK)을 마지막으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에이스 투수는 맥이 끊겼다.

지금 구조대로라면 한국 야구에는 제2의 이승엽, 제2의 박찬호는 나오기 힘들다. 요즘 아마 야구 투수들은 한겨울부터 경기장으로 내몰려 공을 던진다. 심지어는 초등학생 투수들도 직구를 던지기보다는 변화구를 배운다. 경기에 나설 선수는 부족한데 당장 성적을 올리려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팔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수술대에 오르는 선수가 점점 늘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육성위원을 맡고 있는 한경진 선수촌병원 재활원장은 “혹사로 인해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하고 선수 생활을 접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도적인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타자들은 만루 찬스에서도 방망이를 휘두르기보다는 번트를 댄다. 역시 성적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선수 육성과 보호를 위해 KBO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이번 참사는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해선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어설프게라도 성적을 냈더라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표팀 핵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바꿔야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 야구가 살 수 있습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한국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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