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기자의 지금, 여기]이어령 “보혁 다툼은 방휼지쟁… 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를 직시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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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어령

“구한말 때 개화꾼들이 쓰던 안경을 ‘개화경’이라 부르고, 그들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는 ‘개화장’이라고 불렀지요.” 10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난 이어령 이사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구글 안경을 쓰고, 인공지능(AI) 지팡이를 짚고 다닐 것”이라며 손가락으로 둥근 안경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구한말 때 개화꾼들이 쓰던 안경을 ‘개화경’이라 부르고, 그들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는 ‘개화장’이라고 불렀지요.” 10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난 이어령 이사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구글 안경을 쓰고, 인공지능(AI) 지팡이를 짚고 다닐 것”이라며 손가락으로 둥근 안경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전승훈 기자
전승훈 기자
2017년의 시작은 대혼란이다. 탄핵과 조기 대선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한중일 간 외교 갈등에도 속수무책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83)은 10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연구실에서 기자와 만나 “2016∼2017년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문명사적으로도 대전환기”라고 진단했다. 국경 없는 글로벌 사회로 나아가던 지구촌 문명에 갑자기 곳곳에서 높은 벽이 등장하는 퇴행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 이사장은 2006년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통합을 역설했고, 2008년 리먼 사태 당시에는 금융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생명자본주의’ 운동을 제안했다.

수년 전 건강 문제로 외부 활동을 끊은 채 ‘한국인 이야기’ 집필에 몰두해 왔던 그는 지난해 3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 은퇴를 번복했다. 그는 최근 인공지능(AI)이 불러올 미래 문명에 대한 연구와 강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은 1차, 2차, 3차처럼 순차적으로 오는 물결이나 파도가 아니다”라며 “순식간에 튀어나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쓰나미 같은 혁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문학과 첨단 기술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전 세계가 처한 위기와 한국이 나아갈 길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을 2시간 넘게 쏟아냈다.

올해의 화두는 ‘벽을 넘어서’

―현재 우리 앞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올해의 키워드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내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전 세계에 보냈던 메시지인 ‘벽을 넘어서’가 올해 다시 화두다. 당시에는 동서 냉전과 남북 분단의 장벽을 비롯해 빈부, 세대, 남녀 간 젠더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후 수십 년간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유럽이 통합하고, 글로벌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해부터 높고 두꺼운 벽들이 다시 출현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트럼프 월(Wall)’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륙과 해양 세력 간의 갈등이 재연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아베 신조 등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강력한 내셔널리즘이 대두하고 있고, 중국도 사드 배치를 이유로 한류에 대해 다시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이 이사장은 우리 사회 내부에도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광화문에 촛불과 태극기 시위로 둘로 나뉜 높은 장벽이 생기고 있다”며 “올해 보혁(保革) 간 ‘방휼지쟁(蚌鷸之爭)’의 벽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라고 말했다. ‘방휼지쟁’은 조개와 도요새가 다투다가 함께 어부에게 잡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제3자만 이롭게 하는 싸움을 뜻한다. 그는 “우리에겐 함께 풀지 않으면 민족 생존이 불가능한 더 큰 분단의 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온 세상에 새로운 벽이 쌓여 가는 시대, 벽을 넘기 위한 방법은 뭔가.

“만리장성과 로마 가도(街道)를 만드는 공법은 똑같다. 만리장성을 옆으로 눕히면 평탄한 로마 가도가 되고, 로마 가도도 세우면 높은 장벽이 된다. 절벽에 부딪힌 인류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은 AI와 4차 산업혁명이다. 산업화가 육체의 확산이었다면, AI는 뇌의 확산이다. 지난해 알파고가 왜 한국에서 바둑을 두었을까. 바둑의 종주국인 중국과, 바둑을 전 세계에 전파한 일본을 제치고 말이다. 알파고가 보여 준 것은 바둑 대결이 아니다. 미래 문명에 대한 선언이었다. 대륙과 해양 세력의 문명이 교차해 온 한반도에서, 그것도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 사건이 열린 것은 의미심장하다.”

―알파고가 인간 최고의 바둑 고수를 꺾은 것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AI에 대한 공포심도 컸는데….

“나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거꾸로 인간의 뇌에서 희망을 봤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는 데 소비한 전력은 25만 kW였던 반면, 이세돌의 뇌가 소비한 에너지는 겨우 20W에 불과했다. 앞으로의 관건은 어떻게 인간의 뇌처럼 적은 에너지로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AI를 만드는가 하는 싸움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물건이 AI 컴퓨터와 연결된다는 사물인터넷(IoT)에 대한 구상도 엉터리가 된다.”

이 이사장은 “전 세계 모든 사물이 인터넷을 통해 AI와 연결돼 범용인공지능(AGI)이 생겨났을 때 엄청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난다고 한다”며 “인간의 뇌 수준의 에너지 효율성을 갖춘 AI 컴퓨터를 개발하면 원자력발전소 100만 기를 대체하는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알파고 25만 kW 대 이세돌 20W

―알파고 이후 세계 각국의 인공지능 경쟁은….

“한국에서는 지난해 3월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 이후 ‘AI 위협설’로 호들갑을 떨다가 금세 관심이 시들해졌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는 포스트 알파고 1년 만에 엄청난 대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알파고가 화상 인식, 음성 인식, 문자 인식을 통해 스스로 바둑을 배운 ‘딥러닝’(심화학습) 기술은 바둑뿐 아니라 의료 기기, 복지, 법률, 안전, 엔터테인먼트 등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딥러닝’을 개발한 캐나다 3인방 중의 한 명인 세계적인 AI 권위자 앤드루 응은 현재 중국 바이두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은 최근 ‘AI 굴기(굴起)’를 공식 선언했다.”

―미국 정부가 AI의 대두로 47%의 직업이 사라지고 빈부 격차는 더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AI 위협설은 영국 옥스퍼드대의 마이클 오즈번 교수의 연구 결과를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오즈번 교수는 사라지는 직업 이상으로 새로운 직업이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가 실용화되면 80대 할머니도 양로원을 나와 근육질의 젊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대형트럭을 운전하는 직업을 갖게 될 수도 있다.”

―한국의 AI에 대한 준비는….

“우리는 1990년대에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기술(IT)은 앞서가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눈부신 약진을 했다. 그런데 현재 AI 분야에서는 세계 10위권에도 못 든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한테도 뒤지고 있다. 구한말 산업화에 늦어서 패권주의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앞에선 진보, 보수가 따로 없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데 1등칸, 3등칸 손님이 따로 있나. 카지노에서 돈을 땄든, 잃었든 무슨 차이가 있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트럼프의 이민 제한 정책 이후 딥러닝을 개발한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소에는 수많은 AI 전문가가 모여들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아닌 캐나다 변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면 우리도 사람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도 태생인 구글의 최고경영자(CEO) 순다르 피차이가 방한해서 젊은이들에게 ‘실패하라’는 말을 했다. 악담 같은 말이 약이 된다. 늙은이는 쓰러진 자리가 무덤이 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넘어진 자리가 바로 성공의 출발점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오늘은 어둡다. 내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 젊은이들에겐 모레, 글피가 반드시 있다.”

이 이사장은 인터뷰 동안 현실 정치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내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문체부 초심으로 돌아가야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최순실 국정 농단, 블랙리스트 논란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현 사태를 바라보는 소회는….

“문체부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세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첫째, 문화의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의 부지깽이’가 되라는 거였다. 둘째는 누구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우물가의 두레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의 인프라 구축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은 ‘바위의 이끼’ 역할이다. 메마르고 단단한 바위 같은 사회를 부수려 하기보다는 생명의 이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라이더는 혼자 날 수 없다. 처음엔 견인차가 끌어 주다가 날게 되면 줄을 풀어 줘야 한다. 아니면 다시 떨어진다. 문화에 불을 붙여, 물을 축이게 하고, 생명의 이끼로 덮어 스스로 날 수 있게 됐는데도 정부가 계속 줄을 잡고 끌고 다니면 문화는 생명을 잃는다.”

―88 서울 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의 아이디어로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줬다. 평창 겨울올림픽이 전달했으면 하는 메시지는….


“강원도와 평창이 어떤 곳인지는 꼭 알려주었으면 한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이곳은 산간 지역이라 낮은 짧고, 밤은 길고,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다. 어떤 곡식도 자라지 않아 가난하니 부디 세금을 면해 달라’는 내용이다. 그렇게 열악한 자연환경이 현대에는 겨울 스포츠의 천혜 조건이 된 것이다. 평창처럼 가난했던 지역이 올림픽 개최지로 변신한 역사를 알려 전 세계 비슷한 처지의 지역에 희망을 던져 줬으면 한다.”

이 이사장은 “평창 올림픽 준비가 늦어져 여러 가지 말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한국인은 원래 닥쳐야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잘한다. 정치적인 문제를 잘 극복하고 단합한다면 틀림없이 잘 치러 낼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평생의 친구이던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소회는….


“박 회장을 문상하면서 어리석은 자는 사후에 ‘돈’을 남기지만 슬기로운 자는 ‘사람’을 남긴다는 말을 생각했다. 박 회장은 출판을 통해 저자와 독자들 같은 많은 사람을 남겼다. 또한 그보다 더 귀한 ‘일’을 남기고 갔다. 책을 쓰고 읽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 가는 바로 그 일 말이다. 신기술의 개발은 과학자의 몫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회에 적용하고 실행할 것인가는 인문학자의 역할이다.”
  
이어령은

△서울대 국문학과
△이화여대 교수
△문학사상사 주간
△1990∼91년 초대 문화부 장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기획
△2002년 한일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의장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생명이 자본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등.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어령#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알파고#민음사 박맹호#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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