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혁백 고려대 교수 “광장은 선동이 지배할 위험… 의사당 정치가 분노 풀어줘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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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후 한국사회를 말하다]<5·끝> 촛불과 광장

임혁백 교수는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광장의 집회는 국회를 움직였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진행 중이다. 이제 공은 
의사당으로 넘어갔으니 제도권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8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를 연구해온 임 교수는 28일 퇴임을 
앞두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임혁백 교수는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광장의 집회는 국회를 움직였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진행 중이다. 이제 공은 의사당으로 넘어갔으니 제도권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8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를 연구해온 임 교수는 28일 퇴임을 앞두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광장 민주주의는 직접적이고 참여적입니다. 광장엔 룰(rule·규칙)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선동과 민중주의가 지배할 가능성이 큰 공간입니다. 광장의 요구가 정제되지 않고 바로 분출될 경우 우리나라는 분열과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비교정치학자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65)는 “극심한 격차가 있는 사회에서 다중(多衆·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의 분노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들의 행동은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촛불 100일을 맞아 ‘촛불과 광장’의 의미를 듣기 위해 이달 말 정년퇴임을 앞둔 임 교수를 최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만났다.

다중의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세월호 참사, 저임금 노동과 청년실업, 과도한 교육비, 노인 빈곤 등 축적된 분노를 표출할 출구가 필요한 가운데 국정 농단 사태가 터졌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탄핵이라는 ‘우산’ 아래 다중의 분노가 집결됐습니다. 만일 이들의 요구를 의사당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은 혁명과 같은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불행한 후퇴를 겪을 수 있습니다.”

임 교수는 탄핵소추까지 불러온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이라 일컬었다. “4·19혁명, 6월 민주항쟁 때는 화염병과 최루탄을 던지고 사람이 죽어간 반면 촛불혁명은 일종의 명예혁명입니다. 추운 겨울에 전국적으로 1000만 명(12주간 집회 참가 총인원)이 모였기에 ‘제3의 민주혁명’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는 “(전통적 집회 참석자뿐 아니라) 직장인, 청년, 주부, 농민 노동조합, 여성단체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다중이 이 혁명의 주체가 됐다”며 “대중과 민중 중심의 과거 혁명들과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이번 국정 농단 사태로 ‘보수가 몰락했다’고 평한다. 국정 농단을 지휘한 세력은 물론이고 방관한 이들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아직 보수의 대안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보수 정당 후보들의 지지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수적 가치를 표방하는 후보들은 사태를 수습할 ‘보수주의적 대응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탄핵 반대 같은 시대착오적 주장을 해선 안 됩니다.”

임 교수는 탄핵과 관련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심판’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공적 신뢰(public trust)를 배신한 것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게 곧 탄핵입니다. 국민이 탄핵을 결정했고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절차적 정당성만 따져 탄핵을 인용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헌법을 제정한 1789년 필라델피아 제정회의를 예로 들었다. 그는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탄핵은 의회의 권한’이라고 못 박았다”며 “미국에선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면 상원에서 탄핵을 결정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상원의 역할을 헌법재판소가 대신 맡은 것뿐이다. 헌법재판관들은 법률가적 마인드를 갖고 탄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기본적으로 탄핵은 국민과 국회의 권한”이라고 밝혔다.

2014년 임 교수는 저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았다. 이 책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시간의 충돌과 공존’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한국 정치를 분석했다. 그는 “국정 농단 사태가 곧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언행에서 샤머니즘적 행태까지 보여주는 최순실 씨는 ‘전근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블랙리스트로 대표되는 유신의 흔적과 탄핵이라는 민주적 절차는 ‘근대’다. 동시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다중이 소통해 촛불집회를 여는 것은 ‘탈근대’적 요소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사회는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동시에 섞여 있다는 분석이다.

임 교수는 “이성의 질곡을 메우면서 역사는 발전해 왔다”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모순을 해소하면서 계속 진보해왔습니다. 이번 국정 농단 사태는 ‘박근혜의 위기’일 뿐 ‘대한민국의 위기’는 아닙니다. 다중의 요구는 우리에겐 한 차원 더 진보하는 기회가 될 겁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임혁백 교수는


서울대와 미국 시카고대(석·박사)를 졸업한 뒤 1991년부터 이화여대, 미국 조지타운대와 듀크대 교수로 일했고 28일 19년간 근무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년퇴임한다. 김대중 정부 5년간 대통령자문정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2015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았다. ‘박정희 ERA’ ‘비동시성의 동시성’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와 평화’ 등의 저서가 있다.
#임현백#선동#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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