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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정치

[심규선 칼럼]분노에 펜을 담그니 칼이 되더라

입력 2016-11-07 03:00업데이트 2016-11-0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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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잘못이 너무 크기에 모든 언론이 비판적이지만
그동안 언론의 충고를 철저하게 묵살해온 대통령의 자업자득도 한몫
식물대통령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데 과연 대통령이 할 수 있을지
그러지 않으면 언론은 비판적 태도를 바꾸기 힘들 것
심규선 대기자
 지난주 일본에 다녀왔다. 어느 신문, 어느 채널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나왔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런데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일부 민방은 ‘세뇌’ ‘마인드 컨트롤’ ‘영세교’ 등의 단어를 써가며 박 대통령과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디테일이 놀랄 정도였다. 틀린 것은 없었지만 박 대통령은 ‘음습한 지도자’, 그런 지도자를 뽑은 한국은 ‘이상한 나라’라는 인상을 주기에 족했다.

 일본에서 박 대통령의 인기는 원래 바닥이다. 제3국에서도 늘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해 왔기 때문에 ‘고자질 여학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일본에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을까. 하지만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원인 제공자는 분명 대통령이고, 그걸 어떻게 보도하든 일본 매스컴의 자유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심사가 복잡했다. 29년 전 6월 민주항쟁 때도 나는 같은 곳에서 취재를 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는 하도 많이 들어 꿈속에까지 따라왔다. 당시 광장을 메운 것은 대학생들이었지만 그들 뒤에는 군사정권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를 원하는 온 국민이 있었다. 매일 최루탄 가스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돼도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뛰었다. 6·29 민주화 선언은 그 훈장이었다. 그런데 이번 집회에서는 가슴이 뛰지 않았다. 국민의 분노는 현실이지만,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에.

 신문기자가 된 지 33년, 나는 요즘 전례 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 모든 매스컴이 똑같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 말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어쩔 수 없이 대통령 편을 드는 소위 관변 신문과 어용 방송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논리에 따라 신문과 방송들의 논조는 크게 갈렸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언론은 늘 존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든 매스컴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대통령의 잘못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만 나는 한 가지 점에 더 주목한다. 어떤 매스컴도 대통령에게 부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매스컴은 대통령의 통치, 인사, 소통, 여야 관계 등에 대해 끊임없이 충고해 왔다. 그러나 대통령은 철저하게 묵살했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대통령은 처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해 1월 12일의 기자회견 이후 대통령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을 교체하라는 요구가 많았으나 대통령은 거꾸로 이들을 두둔했다. 분노했고 절망했다. 대통령의 뒤틀린 현실인식과 오만의 정점에 우병우 민정수석이 있다. 펜이 칼로, 마이크가 창으로 바뀐 것도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나는 대통령이 눈물을 글썽이고 사과를 했다고 해서 그가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존심 강하고 폐쇄적인 사람에게 멘붕 상태가 왔을 뿐이다. 언론을 무시하는 태도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꼭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빼놓거나, 본인은 사건에서 비켜나 있는 듯한 표현을 하는 게 그런 짐작을 뒷받침한다.

 대통령은 하야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중고생한테까지 물러나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야를 하지 않는 게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야를 요구하는 야당이나 야권 인사들이 국가를 경영할 준비가 돼 있는지도 의문이다. 해결책은 백가쟁명이다. 모두가 멘붕 상태라서 그렇다. 길지는 않지만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다만, 대통령은 사태 추이와 관계없이 지금부터 행동으로 변화를 증명해야 한다.

 아랫것들 마음고생 시키지 말고 수사를 받기 전에 뭘 잘못했는지를 먼저 고백해야 한다. 김병준 총리 후보에게 약속했다는 ‘권력 분산’은 공개적으로 밝히고, 자신은 2선으로 후퇴하겠다는 것도 언명해야 한다. 그래도 야당이 김 후보를 반대한다면 고집부리지 말고 여야 합의로 총리 후보를 바꿔야 한다. 내각도 거의 조각 수준으로 다시 짜고, 새누리당의 지도부 교체도 지지해야 한다. 이게 식물대통령이 동물국회와 공존하는 첫걸음이다. 그 다음에야 국민과 만날 수 있다.

 이런 요구들은 특별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신문에 모두 나오는 얘기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이 식물대통령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위기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통령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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