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수용]김영란법 1호 재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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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미국 연수 때 초등학생이던 딸의 담임은 1990년 한국에서 방영된 어린이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에 나왔던 히메나 선생님을 빼닮았다. 담임은 딸이 일기를 쓰면 늘 아래쪽 여백에 일기만큼 긴 코멘트를 달아 줬다. 우리 부부는 그런 담임에게 학부모 상담 기간에 20달러짜리 커피이용권을 선물했다. 거절할까 걱정도 됐지만 우리의 히메나 선생님, 너무나 환하게 웃으며 받았다. 말 그대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부패의 에티켓’이라는 기획물에서 부패한 국가에는 뇌물을 부르는 은어가 발달해 있고 뇌물을 줄 때 갈색 봉투를 쓰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순수한 선물이라면 다른 이름을 붙일 이유도, 내용물을 가릴 이유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뇌물을 ‘떡값’ ‘급행료’라고 부르고 돈 액수가 드러나지 않게 봉투나 음료수 박스를 사용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패 정도 평가에서 한국이 9위에 오른 것은 부끄럽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춘천경찰서는 그제 고소인 A 씨(55)가 수사관에게 4만5000원짜리 떡 상자를 보낸 것을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으로 보고 법원에 과태료 부과를 의뢰했다. 지난달 28일 법 시행 이후 재판에 넘겨진 첫 사례다. 떡을 받은 뒤 사건 접수까지 20일이 걸렸으니 경찰에서도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돈 문제로 지인을 고소한 A 씨는 수사관이 개인 사정을 감안해 조사 시간을 바꿔 준 것이 고마웠다고 했다. 하지만 조사 시간은 고소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 당연한 일에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은 과거 관청의 문턱이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다.

 ▷국민들 반응은 ‘사소한 일로 재판까지 받게 하는 건 과하다’는 쪽과 ‘작은 것부터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나뉜다. 거액의 떡값이 아니라 사후에 진짜 떡을 준 게 김영란법 1호 재판의 대상이 됐다. 뇌물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 공모하는 큰 부패는 은밀하고 조직적이다. 법이 ‘작은 인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피라미만 잡는다면 부패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뇌물#떡값#청탁금지법#김영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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