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의 오늘과 내일]소통 사회와 그 적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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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소통(疏通)’이란 단어는 내 학창 시절 기억 속에 없다. 소통이 어떤 함의를 지닌 특별한 일상으로 다가온 건 2000년대 초중반이다. 3김의 시대가 저물고 고루한 지역주의에 세대와 진영의 논리가 파도처럼 밀려들던 때였다. 그 저편에선 인터넷과 모바일이 어떤 괴물을 데리고 올지 모른 채, 경이로운 네트워크의 세계만 손꼽아 기다렸다. 

 소통은 권력의 대척점에서 존재한다. 1990년대 청와대에 있었던 한 중진 의원의 회고.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 본관으로 가면 위압적인 빨간색 카펫이 집무실까지 이어졌다. 집무실 문 옆에는 거울이 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라는 거다. 그쯤 되면 ‘오늘은 꼭 한마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결기는 온데간데없다. 문을 열면 대통령이 한없이 높게만 보였다.”

 권력(권력자)에게 소통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박카스 아줌마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윤여정은 인터뷰에서 “예순 되던 해에 결심한 게 있다. 이제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하고만 일하리라.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사치스럽게 나의 커리어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누구나 원하지만 힘을 가진 자만 가능한 꿈이다.

 우리는 한 줌의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연출한 ‘소통 거부 코미디’를 목도했다. 6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이후 금융위원회 간부 공무원이 “보도자료 외에 새로운 정보를 특정 매체에 제공하면 김영란법 위반이 될 수 있다”며 취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가끔씩 이 나라의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을 못 해 환장한 사람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다.

 이런 분들은 소통을 위한 보통 사람들의 노력이 어떤 감동과 기적을 만들어 내는지 잘 보시라. 최근 한 이동통신사의 캠페인 광고를 보고 가슴이 찡했다. 소치 겨울 패럴림픽에서 4위를 한 시각장애인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선수 양재림 씨(27·여)와 그의 가이드러너 고운소리 선수의 이야기였다. 왼쪽 눈을 완전히 실명하고 오른쪽 눈도 시력이 거의 없는 양 선수가 슬로프를 내려올 때 바로 그의 앞에서 같이 스키를 타며 코스를 인도하는 이가 고 선수다. 양 선수는 캄캄한 설원을 오로지 블루투스로 들려오는 고 선수의 목소리에만 의지해 시속 100km로 활강한다. 자신보다 타인을 더 믿고 의지해야만 가능한 소통과 신뢰의 완전한 경지다.

 이 나라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소통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들이 살고 있다. 영화 ‘국가대표2’의 주인공 리지원(수애 분) 역의 실존 인물인 북한 출신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 황보영 씨(37)는 어린 시절 친언니처럼 지냈던 넷째 이모를 너무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생을 그리워하는 엄마 때문에 내색도 못 한다고 했다. 남한의 이산가족 생존자 6만3670명 중 70대 이상 고령자가 5만3708명(84.4%)이다.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당 태종 이세민은 소통 리더십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군주다. 태자였던 형을 죽이고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거쳐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태평성대를 간절히 원했다. 자신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반대파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제도화했다. 다름을 인정하면 신뢰가 형성되고 이는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게 정관의 치세가 던지는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52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반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것은 200점짜리다. 노벨위원회가 투표에서 부결된 미완의 평화협정안에 상을 줘 그 소통의 불씨를 꼭 살려내겠다는 간절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소통은 간절해야만 시작된다. 그 간절함이 기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taylor55@donga.com
#소통#권력#죽여주는 여자#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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