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망명’ 계기로 본 유럽주재 北외교관 실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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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로 돈줄 막혀 “운전때 車통행료 걱정”

태영호씨 둘째 아들 한국에 입국한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의 차남의 모습. 사진 출처 가디언
태영호씨 둘째 아들 한국에 입국한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의 차남의 모습. 사진 출처 가디언
“대사관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면 ‘혼잡통행료는 어떻게 하나’ 생각해야 한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55)는 2013년 영국의 한 모임에서 궁핍한 외교관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고향에 있는 친구들은 내가 수영장 딸린 궁전에 사는 줄 알지만 침실 2개짜리 아파트에서 한 달에 1200파운드(약 175만 원)로 산다”라고 밝혔다.

유럽 각국의 북한대사관에는 외교관이 약 5명씩 파견돼 있다. 이들은 태 공사처럼 본국에서는 선망과 시기의 대상이지만 조국을 배신하지 않을까 서로 감시하면서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특히 올해 유엔과 유럽연합(EU)의 대북제재로 돈줄이 거의 막혀 버렸다. 주영 북한대사관은 5월 조선민족보험총회사(KNIC) 런던지사가 문을 닫아버린 게 치명적이다. EU는 4월 이 보험사의 평양 본사와 독일지사 및 런던지사를 대북제재 명단에 추가했다. 이 보험사가 번 돈이 북한 정권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자금으로 흘러들어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보험이라는 명목으로 한 번 계약할 때마다 수십만 달러의 돈을 쉽게 벌어온 주영 북한대사관은 타격이 컸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이스 애널레이 영국 외교차관은 올 4월 데이비드 앨턴 상원의원에게 보낸 질의 답변서에서 “북한 관리들이 금지된 품목들을 거래하는 데 계속해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유엔 전문가 패널 보고서의 증거를 우려하고 있다”며 “영국 정부는 북한대사관에 우리의 우려를 전달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대사관이 집권층의 사치품 조달 창구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며 영국 정부의 감시가 심해진 것이다.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도 가시방석이다. 2012년부터 대사관 3개 동 가운데 2개 동을 유스호스텔로 쓰면서 경비를 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일단은 대사관 운영비 정도의 소액이라 지켜보고 있지만 본국으로 그 돈을 송금하는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조치를 취하겠다”며 감시의 눈초리를 강화하고 있다.

EU 내에서 유일하게 500명 정도의 북한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는 폴란드의 북한대사관은 EU에서 노동자들의 인권 유린을 이유로 강하게 압박하고 있어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폴란드는 올 들어 북한 노동자에 대해서는 신규 비자 발급을 하지 않고 있다.

영국과 독일에 있는 현학봉 이시홍 북한대사는 올해부터 각국 대사관 주최 리셉션 자리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두 대사 모두 1, 2월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을 때 영국과 독일 외교부에 초치돼 강한 질타를 받았다. 현지 소식통들은 “외교, 무역 관계가 단절된 상태이기 때문에 북한 외교관들은 나와도 별로 할 일이 없다”며 “불려가서 혼나는 것 외에 상대 고위직을 만날 일이 없어 매우 위축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대사는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본국의 소환을 받았고 독일이 후임 대사의 임명 동의(아그레망)를 거부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과 미수교 국가라 대사관이 없는 프랑스에서는 유네스코 북한대표부가 대사관 역할을 한다. 유네스코 북한대표는 가끔 프랑스 외교부 주최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올해 초 우리 측이 프랑스 정부에 항의한 후 어느 자리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

북유럽 스웨덴과 EU 회원국이 아닌 스위스의 북한대사관은 상대적으로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스위스도 6월 1일 북한 은행의 스위스 지점, 스위스의 북한 은행 지점을 폐쇄하는 등 제재 수위를 높여 가고 있다.

그나마 가족과 함께 나와 있는 태 공사는 상당히 특혜를 누린 외교관이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태 공사의 둘째 아들은 올가을 명문대인 임피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할 예정이었다. 친구들은 그가 학교에서 최고 성적인 ‘A+’를 받을 만큼 수재(brain)였다고 전했다. 태 공사의 망명으로 유럽에 나와 있는 북한 외교관들은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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