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케이크가 섹스보다 달콤, 말이 됩니다”

홍정수기자 입력 2016-06-11 03:00수정 2016-06-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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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자, 세상을 향해 처음 입 열다
‘무성애(無性愛·asexuality).’

누구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걸 말한다.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졌던 ‘모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는 것’이 무성애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대신 ‘유성애(有性愛)’로 정의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유성애라는 말도, 자신이 유성애자라는 사실도 잘 모른다. 무성애자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섹스에 관심 없다”는 말을 들으면 유성애자들은 되묻는다. “말이 돼? 너,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성 담론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서 마치 유령 같은 존재였던 무성애자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말을 걸었다. 무성애를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에이로그(A-LOG)팀’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최근 펴낸 ‘A-LOG BOOK’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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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가 섹스보다 낫다”

‘그 누구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것이 무성애자의 ‘정의’이다. A 씨(23·여)는 “동성을 볼 때 ‘친구로서의 친밀감’만 느꼈고, 이성을 볼 때 ‘미적인 끌림’만 느꼈다”고 말했다. B 씨(34)는 “인간의 신체를 보면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왕성한 성적 호기심으로 ‘반쯤 미쳐 있는’ 사춘기를 지날 때 무성애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C 씨(24)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야간자율학습실에서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휘황찬란한 섹스 판타지를 이야기하던 날을 회상했다. 그는 “내 차례가 온 순간 나의 판타지에는 ‘섹스’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멘붕(멘털 붕괴)’이 왔다”고 말했다. D 씨(32·여)는 “학창 시절 누군가가 연예인 ‘몰카’ 비디오를 교실에서 몰래 TV로 틀어서 다 같이 보는데 나는 화면 전환이 몇 초마다 이뤄지는지 시간을 재고 있었다”고 말했다.

무성애자라고 밝히면 사람들은 으레 묻는다. “그럼 연애는 할 수 있어요?”라고. 하지만 꽤 많은 무성애자는 연애를 한다.

널리 알려진 표현 중에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것은 ‘플라토닉 러브’다. 정서적으로는 유성애자들과 똑같이 끌린다. 성적으로, 정서적으로 아무에게도 끌리지 않는 무성애자들도 존재한다.

사랑이 결국 섹스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지? ‘유성애적 생각’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성애자들에게 사랑과 섹스는 전혀 별개의 의미다. “케이크가 섹스보다 낫다”는 무성애자들이 즐겨 쓰는 슬로건 같은 표현이다. 파트너와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것이 성관계를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의미다.

E 씨(22)는 이상적인 데이트의 모습을 묻자 “한 침대에 서로 손잡고 누워서, 서로 쳐다보다가 눈 맞아서 웃고 잠드는…”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D 씨는 “성관계 중에는 ‘인체는 참 따뜻하군’ 정도의 느낌이 들 뿐, 그 밖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먼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와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성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F 씨(19·여)는 “아무하고나 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거 병 아니야?”

한국은 동성애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곱지 않게 쳐다보는 시선이 많다. 동성애라는 말만 나와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무성애는 아예 ‘존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 무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다. 영미권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국민들의 성 지향성을 연구·조사한 적도 있다. 세계 최대의 무성애자 커뮤니티 ‘AVEN’에는 수만 명의 온라인 회원이 있고 관련 연구도 활발하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무성애자들은 수많은 오해를 반박해 가며 “우리는 세상에 실존한다. 의심하지 말아 달라”는 목소리를 키워 가고 있다.

무성애자들이 주위에 ‘커밍아웃’을 한 뒤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 혹시 트라우마 있니?”다. 해석하자면 “넌 원래 정상적인 아이였지만, 성폭력 같은 충격을 받은 뒤 문제가 생긴 것 아니니?”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성적인 트라우마가 있거나 성적 행위를 혐오하는 무성애자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성에 관련된 나쁜 기억은 무성애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유성애 중심적 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긴다고 반박한다. ‘A-LOG BOOK’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고 있다.

“당신은 평소 자장면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굳이 나서서 사 먹지는 않는다. 애인이 원하면 같이 먹어주는 편이지만, 애인이 매일 자장면을 강요해 결국 질린 끝에 거부하게 됐다. 하지만 애인이 자꾸만 자장면을 먹이려고 한다면 아예 구토감이 올라올 만큼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성애가 발기부전이나 불감증 같은 성기능 장애를 정당화하려는 핑계가 아니냐고 묻는다. ‘무성애를 말하다’의 저자인 캐나다 브록대의 앤서니 보게트 교수(심리학과)는 “무성애자들도 쾌감과 ‘여타의 모든 것’은 잘 작동한다. 단지 실제로 마음이 끌리는 대상이 전혀 없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04년 전체 인구의 1%가량이 무성애자라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일부 무성애자는 자위행위를 하며 신체적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유성애자들처럼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흥분을 느끼지 않을 따름이다. D 씨는 “성적 끌림이 없다는 것은 자동차로 치면 그저 옵션이 하나 없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린 무성애자들에게는 “(성관계를) 안 해봐서” 또는 “아직 잘 못해서”라는 오해도 속출한다. 무성애를 ‘성적으로 미숙함’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여자는 서른 넘어서야 느낀다더라” “첫 성관계를 겪어야 ‘어른’이 된다” 등 다양한 발언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무성애자는 다양한 성관계를 경험한 뒤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G 씨(31)는 20대에 경험한 몇 번의 연애가 결국 섹스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자신의 태도 때문에 끝나버린 뒤 스스로를 고쳐보려고 다양한 노력을 했다. 음란동영상을 보고 자위행위도 해봤다. 그는 “흔히 말하는 사창가까지 가봤다”며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이 나에게 애무를 하는 순간 구토를 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유일한 온라인 무성애자 커뮤니티인 ‘승냥이카페’의 매니저 ‘케이’는 “무성애자가 성관계를 많이 겪으면 유성애자가 된다는 주장은 유성애 중심적 사고관의 환상”이라고 말했다.

“좋아하지만, 자고 싶진 않아”

무성애자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순간은 유성애자와 연애할 때나 결혼할 때다. 상대방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면 오해와 갈등이 벌어질 소지는 더 크다. 유성애자는 어떤 상대와 연애관계나 결혼관계를 형성하면 상대방이 잠재적으로 자신과의 성적 행위를 허용한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C 씨는 대학에 와서 만난 첫 여자친구가 헤어지면서 남긴 “나는 너를 고칠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말이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 있다. 사귄 지 얼마 안 돼 그가 무성애자임을 밝혔을 때만 해도 여자친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스킨십의 진도를 조금씩 높일 때마다 C 씨는 그저 ‘그녀가 원하니까 맞춰준다’는 수준에서 응했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닥쳤다. 자신이 잘해주면 남자친구가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결국 “지쳤다”며 C 씨를 떠났다.

H 씨(27) 역시 “연인도 친구의 연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연애를 해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로맨틱한 태도가 나오지 않는다”며 “이 때문에 상대방은 연인 관계의 진전이 어느 순간부터 막힌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배우자를 원하는 무성애자들은 성적인 부분에서 제약이나 갈등을 걱정한다. G 씨는 고민 끝에 결국 자신과 같은 무성애자를 만나 결혼하거나 혼자 살면서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무성애자들이 원하는 건 그저 ‘조금 다른 존재’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보게트 교수는 “성적 소수자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사회의 전반적인 관용과 포용력이 증대될 수 있다”며 유성애자들이 무성애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에이로그팀은 11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성 소수자들의 축제인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다. 올해 17회를 맞는 이 축제에 무성애자가 정식으로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더 많은 무성애자가 벽장 밖으로 나올수록 무성애라는 개념을 사회에 널리 알리고 받아들이기 쉽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밝혔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무성애#욕망#무성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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