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월 300만 원 공돈’의 유혹 뿌리친 스위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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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루체른에 가면 자연 절벽을 파내서 만든 ‘빈사의 사자상’을 볼 수 있다. 치명상을 입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돌사자는 스위스 사람들의 충성심과 용맹을 상징한다. 이 기념비는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가 몸을 피할 수 있도록 최후의 순간까지 궁을 지키다 1792년 8월 10일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해 1821년 8월 10일 제막됐다.

▷다른 근위대원들은 죄다 도망가고 스위스 용병들만 장렬한 최후를 맞은 배경에는 이 나라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신뢰와 신용을 잃으면 자식 세대는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죽음으로 계약을 완수한 것이다. 지금이야 세계의 부국이지만 과거 스위스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강대국 틈새에서 시달리는 유럽의 빈국이었다. 중세 이후 먹고살기 위해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나가 충직한 근무로 전설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바티칸 교황청도 1506년부터 스위스 근위대에서 지키는 이유다.

▷용병으로 나가서도 목숨 바쳐 임무를 완수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스위스 국민은 공짜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가. 비효율적 복지 시스템을 없애는 대신 일 안 해도 기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월 300만 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이 6일 국민투표에서 77% 대 23% 압도적 반대로 부결됐다. 공짜 포퓰리즘에 현혹되지 않고 합리적이고 현실적 판단을 내린 결과다. 기본소득제를 논의 중인 네덜란드 핀란드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궁금하다.

▷스위스에선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사안에 대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이번 투표는 기본소득 도입을 지지하는 단체(BIS)에서 13만 명의 서명을 받아 이뤄졌다. BIS 측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의제로 설정해 국민 관심을 높이는 것이 1차 목표였다는 얘기다. 앞으로도 논의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스위스 국민들이 ‘빈사의 사자상’을 기억하는 한 ‘공돈의 유혹’에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지 않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스위스 루체른#빈사의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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