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이상(李箱)과 동숭동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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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 동아일보DB
시인 이상. 동아일보DB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오/(…)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1부터 13까지 반복되는 똑같은 말, 띄어쓰기 없이 한데 모여 있는 단어들의 강박적인 불안감, 뭔가 불길하고 불가해하여,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키리코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1930년대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이 쓴 ‘오감도(烏瞰圖)’이다. 불과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생을 살면서 2000여 점의 시 소설 수필을 써낸, 말 그대로 천재 시인이다. 그가 있어서 30년대의 우리 문학사는 단숨에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모더니즘의 글로벌한 지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시의 난해성은 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과 수학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한 가역반응’, ‘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 예사롭지 않은 제목 밑에, ‘임의의 반경의 원/원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결부한 직선/두 종류의 존재의 시간적 영향성/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라고 전개되는 시어(詩語)들은 일종의 기하학적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도저히 전통적 문학 관념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이상이 건축을 공부한 공학도였기 때문이다.

이상(본명 김해경)은 1929년에 경성고등공업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명칭의 유사성은 내용의 유사성을 유추하는 법이어서, 경성고등공업을 현재의 실업계 고등학교 정도로 인식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당시 ‘고공(高工)’이라고 줄여 부르던 경성고등공업학교는 5개 학과에 모집인원 총 60명, 입시경쟁률은 13 대 1에서 27 대 1까지, 더군다나 한국인의 입학은 매우 어려웠던 (1926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최고 수준의 엘리트 학교였다. 순수학문의 대학과 실용적 학문의 그랑제콜(Grandes Ecoles)을 분리하여 테크노크라트 엘리트를 양성했던 프랑스식 교육제도를 모방한 제도였다.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합쳐 서울대 공과대학이 되었다. 학교 건물은 지금도 동숭동에 남아 있다.

방송통신대 옆, 도로변에서 약간 안쪽으로 물러나 길에서는 얼핏 보이지 않는, 연한 푸른빛의 르네상스식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1906(또는 1908)년 대한제국 통감부 건축과의 설계에 의해 지어져 오늘날까지 거의 110년간 보존된 유일한 서양식 목조건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 방송대 박물관이 된 이 건물의 팻말에 이상과의 연관성은 물론이고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 건물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종로구 통인동에 이상이 살던 집터의 작은 한옥을 ‘이상의 집’이라 이름 붙이고 해마다 이상의 탄생일과 기일에 문화 행사를 벌이는 문화단체는 ‘이상이 살던 집은 사라졌지만 그가 올려다보던 하늘과 밟았던 땅이 존재하고…’라는 옹색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상이 공부하던 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건물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없는지, 나는 언제나 의아하고 안타깝다. 이 아름다운 건물 앞에 ‘과학기술의 근대적 꿈과 암울한 식민지적 감수성을 접목하려 했던 천재 시인 이상이 다녔던 학교 건물’이라는 푯말을 써 붙여 놓으면 안 될까.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이상#동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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