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나미]‘역질괴담’과 원죄 많은 의료체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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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비용으로 최상의 서비스’ 선진국도 부러워했던 한국의료
메르스 사태 겪으며 전염병 관리 매뉴얼조차 없는 후진적 의료 체계 민낯 드러내
‘뒷북’ 정부, 지나친 비밀주의도 무분별 괴담 확산 부추겨

이나미 객원논설위원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
이나미 객원논설위원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
엄청나게 싼 비용으로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빨리빨리 받을 수 있는 한국의 의료제도는 선진국들이 부러워할 정도다. 외국에 사는 교포들이 한 달 치 보험료만 내고 한국에 와서 의료 서비스만 받고 곧 돌아가기도 하는 이유다. 물론 결핵과 감염 등 전염질환의 관리에서는 아직 후진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도 적지 않다.

다행히 그동안 사스, 에볼라, 에이즈, 독감 인플루엔자 등 감염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혹자는 이를 된장이나 김치 등 발효식품에서 찾고, 혹자는 높은 인구밀도에서 많은 균들과 같이 살면서 내성이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였을까.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환자가 최초로 보고된 후 당국의 대처는 전혀 급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보건복지 공무원들이 역량을 총동원했던 쪽이 의사의 과잉 진료 여부를 감시해서 돈을 환수하고 보험공단에 이익을 남기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일까. 의사들 역시 돈만 밝힌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진단과 저가의 치료를 하는 데 익숙해 보인다. 지금과 같은 싸구려 의료체계는 국민의 건강을 위협할 것이라고 지적한 이들이 많았는데,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역시 예상했던 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든다.

몇 개의 대형병원으로만 환자가 몰리는 상황에서 낮은 수가에 못 견뎌 중소병원들이 도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살아남기 위해 감염 예방을 위한 설치와 매뉴얼을 실시할 수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보건당국이나 의료체계가 갖고 있는 이런 원죄는 전염병이 확산될 때 투명하게 상황을 공개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워낙 비밀주의를 유지하는 이 정부의 색깔에 물들어 공무원들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전염병은 확산되는데 상황이 정확하게 공개되지 않으면 당연히 괴담이 돈다. 언제 어떻게 자신도 그런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다. 입에서 입으로 유언비어가 퍼질 때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과거에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을 찾아 일벌백계한다는 정도로 대처했지만 수백만, 수천만 명이 동시에 들여다보는 SNS의 소식들을 정부가 법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근대 유럽에서 페스트와 홍역 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한 직후 유럽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바뀌는 변화를 겪었다. 전염병으로 노동력이 죽어 나가고 기근이 닥쳤다. 이에 따른 괴담의 확산으로 왕실과 귀족들의 권위가 무너져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앞당겨졌다. 불안한 유럽 땅에서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전 세계로 떠나면서 제국주의의 역사와 이주민의 역사가 열렸다.

미국에 이주한 유럽인들은 신대륙 원주민들에게 의도적으로 천연두 균을 옮겨서 원주민들을 몰살시켰고 몽골 제국도 흑사병 때문에 무너졌다는 이론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도 가뜩이나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전염병과 관련된 ‘긍정적인 괴담’도 있었다. 일본 고서기에 따르면 두창이 유행하자 불상을 뒤엎은 사람들에게만 역신이 붙는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전염병과 싸운 역사적 기록이 많다. 아직 균의 개념이 없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동서대비원, 동서활인서 제도를 통해 역병 환자를 격리시켜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기이니 자연 치유력으로 낫기만을 바라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유교와 불교의 정신으로 절대 권력을 갖고 있던 왕실이 환자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접근을 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한 일이다. 병이 좋아지면 역신에게 배송제를 드리고, 한참 병이 돌 때는 여제를 지냈다. 왕가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전염병이 창궐하긴 했지만 유럽처럼 사회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았던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이참에 원죄 많은 의료체계와 정권의 신비주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서, 지금보다는 더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순 없을까. 순진한 희망을 품어 본다.

이나미 객원논설위원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
#괴담#의료체계#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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